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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 Mar 10. 2017

펜트하우스 : 男女

백수동 35번지 이야기

百修洞 三十五番地 斷面圖 · 백수동 35번지 단면도



35번지에서 아래, 위, 양 옆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은 자리에 위치한 펜트하우스에는 다른 집들과 달리 명패도 있다. ‘환상적인 분홍빛 상처’라 쓰인 꽃분홍 명패가 걸려있다. 처음 35번지에 건물을 올리면서 여자는 펜트하우스에 가장 먼저 그 남자*그 여자*를 입주시키고 꽃분홍 명패까지 달아주었다. 그 남자와 그 여자가 ‘그렇고 그런’ 사이는 아니었으나 그 두 사람 사이에 백수*가 끼어들 때면 세 사람은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었다. 그렇고 그런 세 사람의 관계는, 어떤 날은 환상적이었고 어떤 날은 분홍빛으로 물들었고 또 어떤 날은 상처를 주고받았으므로 꽃분홍 명패는 세 사람의 그렇고 그런 관계를 증명하는데 더없이 잘 어울리는 물건이었다.


그 남자의 첫인상은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였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다시 봐야 할 것 같은 문장들은 그 남자를 만나기 전까지 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어렴풋이 이인간━205호 이야기 참조━을 떠올리게도 하지만 이인간의 성품과는 또 달랐고, 되는 대로 지껄이는 말들은 마치 유리컵에 막 따라놓은 사이다에서 탄산 기포들이 포르르르, 하고 터지는 소리를 닮았다. 속이 시원 해지는 말이라기보다는 귀가 간지러워 큭큭거리게 되는 말들이었다. 그런 그 남자의 말은 더 강한 것을 찾게 만들지도, 강한 것을 중화시켜줄 만한 것을 찾게 만들지도 않아서 여자는 계속해서 그 남자를 만났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 남자는 조금씩 변해갔다. 어떻게 사람이 변하니. 사랑도 변하는데 사람이라고 안 변하겠니. 사람이 변하니까 사랑이 변하는 것인지 사랑이 변해서 사람도 변하는 것인지 도통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 남자의 경우에는 사람이 변했다고 해서 사랑까지 변하지는 않았다. 그 남자는 뱀이 오랜 시간에 걸쳐 조금씩, 제 몸을 꼭 조이는 허물을 벗어내듯이 간지러운 말들을 벗어냈다. 조금 더 굵어지고 길어진 그 남자는 조금 더 길어진 몸을 조금 더 깊은 땅 속으로 늘어뜨렸다. 그 남자가 늘어뜨린 것이 꼬리였는지, 머리였는지… 그 남자가 길어진 몸을 늘어뜨린 것이 깊은 땅 속이었는지, 높은 하늘 속이었는지…. 여자는 그 남자가 어디에 무엇을 늘어뜨렸는지 알 수 없었다. 마치 무지개의 끝과 끝이 어디에 닿아 있는지 절대로 알 수 없는 것처럼. 여자는 그 남자의 변태가 무척이나 좋았다. 그래서 여자는 그 남자가 종적을 감췄어도, 그 남자에게서 치명적인 오류가 발견되었어도, 한 번 더 믿어보기로 했다. 그 남자를 향한 여자의 마음은, 접어 버리기에는 애매한 종이였다. 빛깔은 고운데, 크기도 비율도 애매해서 비행기를 접기에는 종이가 아깝고 학을 접기에는 종이를 잘라내야 하는 게 걸리고 이도 저도 접을 수 없어 그저 어느 책 사이에 끼워 놓을 수밖에 없는. 그래서 여자는 아직 그 남자를 기다리고 있다. 그 남자가 사이다 거품처럼 포르르르, 돌아와 애매한 종이로 무엇을 접어야 좋을지 일러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 여자의 첫인상은 통증이었다. 월경을 시작한 이튿날, 바로 누워도 모로 누워도 앉아도 서도 걸어도 무지근하게 허리를 누르는 통증. 아끼고 아끼느라 한 방울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고무 주걱으로 자궁 내벽을 박박 긁어내는 것 같은 통증. 끈질기게 따라붙는 만큼 오래 남아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월경 중이라는 착각이 들게 하는 통증. 어떤 性에게는 당연한 통증이어서 왜 아프냐고, 어떻게 아플 수 있느냐고 다그칠 수도 없는 그런 통증. 통증만큼 강한 공감도 없다는 것을 그 여자를 만나고 알았다. 머리가 아플 때 다리를 멍 들 만큼 세게 꼬집으면 두통이 잠시나마 잊힌다는 것을 그 여자를 만나고 알았다. 그러나 잠시, 잊는 것뿐, 통증은 통증을 덮을 수 없다는 것도, 그 여자를 만나고 알았다. 기분 좋아지는 앎이라고는 할 수 없었으나 그 여자에게서 멀어질 수 없었던 것은 함께 앓았기 때문일 것이다. 행운인지 불운인지 그 여자를 만날 당시의 여자는 신병 앓는 사람마냥 이유도 없이 앓았다. 고통의 크기를 재어보기보다 그저 아픔이라는 것이 있으며, 때로는 원인이 없을 수도 있다는 것━원인은 있으나 그를 모르니 원인이 없는 것과 같았다━을 공감할 수만 있다면 더없이 고마울 따름이던 그때 그 여자를 만났던 것이다. 그 여자를 만나면 고통도, 통증도 많고 많았다. 이래서 고통스럽고 저래서 아팠다. 그것은 차라리 연대였다. 무엇이 이 통증을 거둬갈 수 있는지 몰라도 괜찮았다. 여자는 그 모든 것들이 차라리 다 제 것이었으면 싶었다. 그 여자의 통증은 너무도 아파서 눈을 번쩍 뜨이게 했다. 그런 그 여자가 사라졌다. 바람결에 전해 들은 그 여자의 소식, 요리사가 되었다 했다. 이 재료 저 재료들은 그 여자에게 받은 통증으로 눈을 드고 허기진 사람들을 마주하고 있을 터였다. 사람들은 통증으로 허기를 채우고 또 하루를 버텨내고 있을 거였다. 그러니 따지고 보면 그 여자는 여전한 셈이었다. 어쨌든 계속되어야 하니까…. 하는 수 없이 여자는, 하염없이 그 여자를 기다리기로 했다. 오래 걸리더라도 돌아올 거였다. 그 여자라면.


백수는 제법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가 디뎌온 계단은 콘크리트를 부어 그저 모양새만 갖춘 것이었지만 백수는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발자국을 남겼다. 또렷이 찍히지 않은 것도 있긴 했지만 그래도. 백수는 일곱 살 생일에 선물로 노트를 받았는데 ━그것은 공책이라기보다 노트였다. 비닐 커버가 씌워져 있었고, 속지는 구간 별로 색깔이 달랐고, 페이지마다 감성이 뚝뚝 떨어지는 글귀들이 쓰여 있었고, 또래 아이들이 갖고 있던 여느 공책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 노트에 백수가 처음 쓴 글은 “미스코리아가 되고 싶다”였던 걸로 기억한다. 미스코리아가 되고 싶다고 써 놓고 글 쓰고 싶다고 읽었던 것도 같다. 글 쓰는 사람이 되는 방법을 몰랐던 백수는 계단을 밟아 올라가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백수는 초, 중, 고, 대학, 입사와 퇴사, 결혼과 이혼, 아침 드라마의 가장 기본적인 소재가 되는 이야기 줄기까지 차근차근 사람이 밟을 수 있는 계단━빠뜨렸어도 좋았을 것까지 모두━은 모두 밟았다. 그러는 동안 백수는 아주 특별한 계단 하나를 밟았다. 제 이름 적힌 책을 한 권 갖게 된 것이다. 당시 백수는 뒤늦게 질풍노도의 계단━아침 드라마 속 격랑을 맞은 주인공처럼 온갖 허튼짓을 할 수 없게 된 나이를 아쉬워하던 참이었다━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 특별한 제안이 왔을 때, ‘과연’이라는 물음표를 곱씹으면서도, 그 제안을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던 참이었다고 생각했다. 또 하나의 계단을 디뎌 백수는 제 이름이 박힌 책을 품에 안을 수 있었지만 그 기쁨을 만끽할 수 없을 만큼 지쳐 있었다. 계단참에 퍼질러 앉아 그저 품에 안긴 ‘첫 아이’를 멀거니 바라보기만 하느라 ‘첫 아이’는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지 못했다. 제 밥그릇은 제가 지니고 난다고, 다행히도 ‘첫 아이’는 아직 버티고 있다. 백수는 ‘첫 아이’를 위해서라도 다음 계단을 밟아야 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윗 계단참에 한 발을 올렸는데, 갈팡질팡하게 만들었던 그 계단처럼 느껴졌다. 이것이 그 말로만 듣던 ‘끝없는 계단’인가 싶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같은 자리를 맴돌 수는 없었다. 지금껏 그래 왔듯 성실하게 계단을 밟아 올라가야 했다. 그래서 백수는 자유를 찾아가 부탁했다. 저를 돈에게 노예로 팔아달라고, 노예가 되어야 할 것 같다고, 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 다시 돌아올 거라고, 원래 몰래 만날 때 더 짜릿한 거라고, 떨어져 지내다 보면 우리의 권태가 변태 할 수 있을 거라고. 아무 말이나 가져다 자유 앞에 쌓아 올렸다. 자유는 기다렸다는 듯 백수를 돈에게 팔아넘겼고, 헤어지던 날 백수의 옷깃을 조금 찢어내더니 정표로 간직하겠다고 했다. 언젠가 다시 돌아와 이 옷깃을 기워 입으면 되게 빈티지하고 막 멋있고 그럴 거라고, 되는 대로 말을 주워섬겼다. 통속적인 아침 드라마처럼 상투적으로 백수와 자유는 이별했다. 그리고 백수는 다시 계단을 하나씩 밟아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러나저러나 계속되어야 했고, 버텨내야 했으니까.



펜트하우스

그 남자 : 박민규

제8회 문학동네 신인작가상 수상작 : 지구 영웅 전설 / 문학동네 / 초판 2003년 6월 20일 / 7,500원

2007년 이효석 문학상 수상작품집 : 누런 강 배 한 척 / 해토 / 초판 1쇄 2007년 7월 30일 / 9,500원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 위즈덤하우스 / 초판 1쇄 2009년 7월 20일 / 12,800원

2009 황순원 문학상 수상작품집 : 근처 / 중앙일보·중앙 books / 초판 1쇄 2009년 9월 22일 / 10,000원

더블 - side A·B / 창비 / 초판 1쇄 2010년 11월 11일 / 각권 12,900원

2010 이상 문학상 수상작품집 : 아침의 문 / 문학사상 / 초판 11쇄 2010년 2월 3일 / 12,000원

카스테라 / 문학동네 / 1판 17쇄 2010년 2월 5일 / 10,000원

핑퐁 / 창비 / 초판 12쇄 2012년 11월 4일 / 11,000원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 초판 42쇄 2013년 2월 25일 / 9,500원

버핏과의 저녁식사 / 아시아 / 초판 1쇄 2014년 9월 5일 / 7,500원

그 여자 : 천운영

바늘 / 창비 / 초판 2쇄 2001년 12월 10일 / 8,000원

잘 가라, 서커스 / 문학동네 / 1판 2쇄 2005년 12월 7일 / 9,500원

그녀의 눈물 사용법 / 창비 / 초판 2쇄 2008년 3월 25일 / 9,800원

명랑 / 문학과지성사 / 초판 5쇄 2008년 8월 27일 / 10,000원

생강 / 창비 / 초판 1쇄 2011년 3월 18일 / 11,000원

엄마도 아시다시피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6월 24일 / 12,000원

백수 : 유정

고양이가 필요해 / 지콜론북 / 초판 2016년 6월 20일 / 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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