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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 Mar 31. 2017

305호 : 半半

백수동 35번지 이야기

百修洞 三十五番地 斷面圖 · 백수동 35번지 단면도



305호에서 사람보다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도구’다. 쪽빛보다 짙은 잉크가 한 병, 싸구려 나무를 깎아 만든 펜대가 두 자루, 제각기 다른 굵기의 펜촉이 여남은 개, 어떤 필기구를 써도 오롯이 다 받아내는 노트 두 권, 푸르고 붉은 ━색깔이 골고루 묶여 있는 세트는 비싸다는 이유로, 혹은 안 쓰는 색이 더 많다는 이유로 푸르고 또 붉고 또 푸른빛과 붉은빛이 이리저리 섞인 것만 잔뜩이다━ 색연필이 또 여남은 개. 마지막으로 일기 대신 끄적인 낱장 그림이 노트 한 권 분량쯤. 여자는 종이와 펜촉이 서로에게 제 몸을 부빌 때 나는 소리가 참 좋았다. 봉긋하게 솟아오른 잉크를 순식간에 빨아들이는 종이가 참 좋았다. 길이 들만큼 자주 쓰지 않아 여전히 모난 펜촉이 종이 위에서 갈팡질팡하는 모습이 참 좋았다. 쓰는 날보다 안 쓰는 날이 많은데도 ‘도구’를 고이 보관하는 이유였다. 무엇보다 펜촉을 머리에 인 펜대의 모습은 거꾸로 보면 꼭 女體를 닮아서, 펜촉으로 무언가를 쓴다는 건 몸 어딘가를 헐어내어 곱게 이긴 즙을 찍어 쓰는 것만 같아 참 좋았다. 그래서 여자는 ‘도구’를 써야 할 때면 밥 먹을 때도 펴지 않는 상을 꺼내 그 위에 도구들을 펼쳐 늘어두고 하나하나 들여다본 다음 신중하게 펜대에 펜촉을 끼워 조심스럽게 잉크를 찍어 슥, 스윽 종이 위에 선을 그었다. 기름진 새 커터날을 쓸 때와 비슷한 쾌감이 느껴졌기 때문에 도구들을 쓸 때면 여자의 팔뚝에는 오소소, 좁쌀 만한 소름이 돋았다. 그래서 305호에는 적잖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지만, 사람 사는 집이라기보다 문구점처럼 보였다.


펭귄들*은 풍그덴━206호 이야기 참조━이 데려왔다. 여자는 같은 개로서 ━여자는 할머니로부터 ‘여름 개띠라 책임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하필 세 번의 복날을 못다 보내고 세상에 난 여름 개띠라서 이다지도 고달픈 것이라고 자책 아닌 자책을 하곤 했다━ 풍그덴처럼 멋진 개는 성심껏 세상에 알려야 한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방송국에 편지를 보냈다. 방송국에서는 고맙게도 답장을 보내왔고, 덕분에 여자는 라디오에 출연하여 풍그덴을 소개하는 시간을 얻을 수 있었다. 얼굴이 비치는 것도 아닌데 여자는 오래된 화장품을 꺼내 오랜만에 화장을 하고 좋은 옷을 입고 방송국에 갔다. 몇 번의 연습을 하고 풍그덴을 소개하는 방송 녹화를 마쳤는데, 여자는 이 일을 계기로 본격적인 섭외 같은 것이 이어졌으면 좋겠다는 작은 소망을 품어보았지만 섭외 전화 대신 펭귄들이 찾아왔다.

여섯 마리의 펭귄들은 하나같이 검은색 ‘비로드’━정식 명칭은 ‘벨벳’이었지만 여자의 어머니는 ‘공단’이라고 불렀고, 여자가 읽었던 책에 나오는 사람들은 ‘비로드’라고 불렀다. 여자는 뭔가 빠뜨린 기분이 드는 ‘비로드’라는 이름이 좋았다━로 지은 턱시도를 입고 있었다. 춥지도 않은데 허들링 하듯 옹기종기 모여서 강강술래 하며 저희끼리 놀았다. 구면인 펭귄도 있고 해서, 여자는 굳이 빙글빙글 도는 동그라미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돌고 도는 것은 차고 넘쳤고, 현기증이 나서 여자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허들링 하는 펭귄들을 보며 바다의 바닥을 걷고 싶다고 생각했다. 천천히 걷다가 고래를 만나면 꼬리에 붉은 실을 달아 헬륨 풍선처럼 데리고 다니기도 하고, 해조류 숲에 들어가 보기도 하고, 걷다가 지치면 해류를 타고 순식간에 이 바다에서 저 바다로 옮겨가기도 하고…. 아가미가 있었으면 싶었다. 그 후로도 숨을 쉰다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던가 싶을 때마다 여자는 펭귄들의 강강술래를 구경하곤 했다.


인도 사람*은 ‘장군신 받은 박수가 있는데 그렇게 잘 맞춘대’, ‘그냥 생년월일만 얘기했는데 다 알더라니까’ 같은 풍문을 따라가듯이 ‘카더라’를 따라가다 만난 사람이었다. 인도 사람을 만날 무렵의 여자는 용하다는 점집 찾아다니듯 철학이라는 것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무려 천주교 신자로서 어엿한 세례명도, 영성체도 받았지만 종교에 있어서만큼은 언제나 사춘기여서 괜히 막 삐뚤어지고 싶고 막 반항하고 싶고 막 장난치고 싶고 막 그런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고, ━성당에 발길을 끊은 지 오래지만 그래도 성당은 늘 마음의 친정 같다고나 할까, 늘 거기 있어주는 무엇 같아 좋은 곳이 또 성당이었다━ 마치 수업 제끼고 놀러 나가듯 이 사람, 저 생각을 기웃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만난 인도 사람의 말들은 입맛따라 해석하기 좋은 예언처럼 듣기 좋았으나 늘 모호한 질문이 남았다. 답이 또렷해 보일수록 질문은 더 모호해져서 여자는 자신의 짧은 ‘가방끈’을 탓해야 할지 어두운 말귀를 탓해야 할지 우물쭈물하다 인사도 없이 인도 사람과 헤어지고는 했다. 큰 생각을 따라가기에 여자가 가진 생각은 빈약했고, 노잣돈도 얼마 없었고, 길잡이도 없었고… 어떤 인연은 너무 빨리 만나는 바람에 이도 저도 아닌 것이 돼버리기 일쑤인데, 인도 사람이 그랬다.


여자는 어려서부터 몸에 관심이 많았다. 어린 시절의 여자는 엄마 손을 잡고 일요일마다 목욕탕에 갔다. 냉장고 속 차가운 우유는 늘 슈퍼보다 2~300원 비쌌기 때문에 집에서 가져와 두 시간 가량 훈증돼 미지근해진 우유나 요구르트만 마셨다. 여자의 엄마가 여자를 어린이집에 맡기듯 온탕에 맡겨놓고 때를 밀거나 습식 사우나에 들어가면 여자는 온탕 안을 사부작사부작 옮겨 다니면서 여자들의 몸을 만끽했다. 이제 막 들어와 자리를 찾는 보송보송한 몸, 땀과 증기가 뒤섞인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몸, 온탕의 온도를 고스란히 새긴 붉은 몸, 고무 주걱으로 매끈하게 다져놓은 듯 가늘고 여린 몸, 흙덩이를 대강 뭉쳐 놓은 것처럼 울퉁불퉁한 배, 늘어진 엉덩이, 멍울 맺히기 시작한 가슴, 긴 다리, 짧은 팔, 두꺼운 발목, 흰 손목….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몸을 만끽했다. 어린 여자는 다른 여자들의 몸을 훔쳐온 날이면 밤새 그 몸들을 천장에 걸어두고 종이인형 놀이하듯 가지고 놀았다. 서로 다른 몸에서 나는 서로 다른 소리와 움직임 같은 것들을 제 몸과 비교해보면서 저 혼자 예쁜 것과 예쁘지 않은 것을 나누었다. 여자에게 몸은 온도였고, 선이었다. 따뜻해서 좋은 온도, 부드러워서 예쁜 선. 여자의 몸은 여전히 그때 그 시절의 ‘인형 놀이’만큼이나 즐거운 것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는 동안 여자의 무언가가 조금 변해버려서 ‘인형 놀이’의 성격도 조금 변해버렸다는 게 ━편견을 만들 뿐인 비교를 대체 어쩌다, 어디서 배우게 된 건지━ 아쉬울 따름이다. 어쨌든 그러한 배경 때문에,

몸을 좀 안다는 사람에 대한 소문이 돌았을 때 여자는 호기심을 감출 수 없었다. 한 걸음에 달려가 만난 그 ‘남자’*는 ‘남자’였다. 그 ‘남자’였으니 그 ‘남자’의 性이 남자라는 건 이상할 게 없었지만 그 ‘남자’의 입에서 나온 몸은 여자의 몸이 아니었다. 모든 남자들이 여자의 몸에 대해 이야기했고 여자의 몸을 제멋대로 재단했고 여자의 몸을 제멋대로 이용했는데, 오래전부터 그래 왔으니 앞으로도 그럴 것 같아 좀 많이 별로인데, 그 ‘남자’는 그러지 않았던 것이다. 남자의 몸으로 시작해서 누구의 몸도 아닌 ‘사람’의 몸으로 끝난 그 ‘남자’의 이야기는 사실 ‘허구’다. 사실이지만 사실이 아니어서 경계를 지우고 ‘되게 긍정적인 어떤 것’을 생각하게 하는 ‘허구’였다. 누구의 몸도 아닌 몸 하나만 남기고 모두 지워버린 ‘허구’. 혹시 몸에 관한 어떤 추억━물에 빠져 죽을 뻔했던 덩치 큰 기억부터 볼에 난 뾰루지에 관한 작은 기억까지 무엇이든━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그 ‘남자’를 만나보면 좋겠다. 특히 남자들. 남자들이 과연 그 ‘남자’가 이야기하는 몸을 알아볼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뭐든 좋은 건 나누는 게 좋은 거니까.


포비아 씨*는 우연히 만난 사람인데 어쩐 일인지 여자는 그를 참 좋아했다. 귀신의 ㄱ자도 무서워 공포, 혹은 호러로 분류되는 영화나 책을 멀리하는데도 포비아 씨와 만났던 건 그 무렵 여자는 계속 화가 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왜 포비아 씨를 만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지나고 보니 당시의 여자는 화가 나 있었다. 그렇다. 포비아 씨는 여자를 대신해 제 손에 피를 묻혔다. 그 과정은 꽤나 잔인해서 여자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며 심호흡을 해야 할 정도였다. 포비아 씨의 희생이라면 희생이라고 할 수 있을 일련의 행동들을 지켜보면서 여자는 속엣것을 다 풀어냈어야 했는데 막상 그러질 못했다. 어리숙하게도 일차원적인 대리만족에 만족하고 말았던 것이다. 좋은 점이라면… 아니, 불행하게도 여자는 공포의 뒷모습을 보고 말았다. 한 번도 보려고 하지 않았던, 보고 싶다는 호기심마저도 없던 그 뒷모습을 마주하고 여자는 어쩐지 슬퍼졌다. 그 많은 화와 분함, 번민, 괴로움들이 화수분처럼 끊이지 않고 흘러나와 결국 슬픔이 되었다. ‘불행하게도’라는 수식어를 쓴 이유는 공포의 ‘망할’ 뒷모습을 보는 바람에 안 그래도 화내지 못하고 살던 여자가 화내고 싶은 마음을 ━화내는 방법을 배우려는 생각을━ 접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개나 소나’ 슬프지 않은 것이 없어서 여자는 또 화가 났지만 이미 포비아 씨가 제 손에 피를 묻히고 있었고, 그를 만날 때마다 공포의 뒷모습을 보아야 했고, 다시 화를 삭이고, 뭐 그렇게 돌고 돌고 또 돌고 있어서 여자는 퍽 난감했다. 화를 내봐야 아무도 화를 낸 줄 모른다는 것도, 기껏 화를 내고도 결국 입이 쓴 사람이 자신이라는 건 화를 제대로 내지 못했기 때문인지 스스로 오만했기 때문인지 알 수 없는 것도 퍽 난감했다. 아, 포비아 씨가 여전히 싫지 않은 것도.


여자는 탐정을 동경한다. 감춰진 것을 들춰내는 용기가 부러웠다. 탐정과 여자가 들추고 싶은 ‘감춰진 것’의 성격이 좀 다르기는 했지만 이것과 저것을 잇고 때로는 떨어뜨리고 퍼즐을 맞춰나가는 과정이 너무나 흥미진진해서 여자는 탐정 이야기라면 잠시 넋을 꺼내 볕 좋은 곳에 널어두고 푹 빠져들었다. 여자가 만난 여러 탐정 중 이 탐정*은 여느 탐정과 좀 달랐다. 지워버리는 일이 전문이었기 때문이다. 이 탐정은 누구나 하나쯤 가지고 있는, 때로는 치명적인 비밀을 세상에서 지워버리는 일을 했다. 몸 밖으로 나온 비밀━말이든 글이든 어떤 형태로든 누군가의 몸 밖으로 나온 모든 비빌━은 이미 비밀이 아니어서, 여자는 제 몸 밖으로 꺼낸 몇 개의 비밀들이 어디선가 사생아처럼 자라고 있지는 않은지, 그 사생아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와 책임을 요구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곤 했기 때문에 구 씨성을 쓰는 탐정이 꽤나 미더웠다. 그래서 탐정이 사건을 해결하고 나면, 금액이 맞는다면 자신의 비밀도 지워달라 의뢰하려고 했는데 탐정은 ‘그림자’처럼 흐릿해지더니 이내 사라져 버렸다.


그의 이름은 묘진*이었다. 묘진은 일몰과 일출 사이 길고 깊은 밤을 걷고 또 걸었다. 걸음마다 인연을 맺었고, 서툴게 맺은 ‘매듭’들을, 마치 다시 돌아올 길을 잊지 않기 위해 남긴 표식인 듯 무심히 지나쳤다. 아무리 걸어도 일출을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걸 깨달은 그가 ‘매듭’을 되짚어 돌아오는 길은 더 깊고 더 길었다. 어떤 매듭은 풀어버리고 어떤 매듭은 다시 묶으며 그는 계속 걸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저 그 자리에 서 있기만 하면 다시 일출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 사실을 깨닫기 위해 그는 멀고 먼 길을 어둠보다 깊은 길을 걸었어야 했다. 어떤 사람이 얻고자 하는 어떤 것들은 펼쳐진 모든 길을 한 번씩 다 밟아야만 얻어진다. 묘진이 그랬고, 묘진이 얻고자 하는 것이 그랬다.


어째서 한글은 ‘간지’가 나지 않는가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하나하나 뜯어보면 예쁜데 모아두면 예쁘지 않아 보이는 이유, 만들지 못하는 말이 없는데 영어나 한자에 밀리는 이유가 궁금했다. 따져보면 빤한 이유였으니, 이유를 찾고 싶은 게 아니라 뭔가 바꿔보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러다 만난 소리 선생*은 문자 이전의 한글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소리로 시작된 한글이 소리에서 소리로 전해지면서 모습을 바꾸고 소리에서 문자로 바뀌면서 몸살을 앓고… 많은 것이 변하는 과정 속에서 많은 것이 길을 잃었다. 한글도 계절과 계절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닐까. 얇은 옷을 입기도, 두꺼운 옷을 입기도 애매한 계절과 계절 사이에서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남겨둬야 하는지 고민 중인 것 아닐까. 그저 계절 사이에 놓은 한글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이 좀 더 많아지면 좋겠다는 소소한 바람 하나. 바람은 어느 계절에나 불었고, 불고, 부니.



305호 사람들

펭귄들 : 펭귄클래식 - 오페라의 유령 / 가스통 르루 / 홍성영 § 지킬 박사와 하이드 /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 박찬원 § 1984 / 조지 오웰 / 이기한 § 셜록 홈즈 : 주홍색 연구 / 아서 코난 도일 / 남명성 §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 괴테 / 김재혁 § 두 도시 이야기 / 찰스 디킨스 / 이은정

인도 사람 :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 정현종 / 물병자리 / 첫판 8쇄 2008년 12월 1일 / 8,500원

그 ‘남자’ : 몸의 일기 / 다니엘 페나크 / 조현실 / 문학과지성사 / 1판 2쇄 2015년 9월 17일 / 17,000원

포비아 씨 : 공포의 세기 / 백민석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11월 15일 / 13,000원

탐정 : 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 / 김중혁 / 문학과지성사 / 초판 1쇄 2014년 3월 20일 / 13,000원

묘진 : 묘진전 1·2·3·4 / 젤리빈 / YOUNGCOM / 1권 초판 2쇄 2016년 9월 1일§ 2권 초판 2쇄 2015년 12월 17일 § 3권 초판 2쇄 2016년 4월 14일 § 4권 초판 1쇄 2016년 5월 20일 / 각권 12,000원

소리 선생 : 내 생애 첫 우리말 / 윤구병 / 천년의상상 / 초판 1쇄 2016년 7월 1일 / 1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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