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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 Apr 10. 2017

404호 : 民音

백수동 35번지 이야기

百修洞 三十五番地 斷面圖 · 백수동 35번지 단면도


35번지 건물 모든 층의 첫 세대는 대체로 어두울 수밖에 없는 구조지만 404호는 맨 위층, 가장 볕이 잘 드는데도 어둑한 편이다. 툭하면 일수 받으러 온 건달처럼 들이닥치는 고양이 때문에 하루에도 몇 번씩 여진(餘震)을 경험해야 하는 404호 사람들은 모두 빈틈없이 바투 붙어 지낸다. 빈틈이 없을수록 덜 흔들릴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는데, 차라리 흔들릴 수 있는 틈을 두는 게 더 좋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섬사람들*은 사실 101호에 있어야 마땅한 사람들이다. 101호 사람들과 비슷한 시기에 찾아왔고, 101호 사람들이 그러했듯 바다처럼 아이를 훈육했다. 여자가 섬사람들을 떠올릴 때면 어디선가 쿰쿰한 땀냄새가 났다. 미간을 찌푸리거나 고개를 돌릴 만큼 기분 나쁜 냄새가 아니었다. 그 냄새는 따뜻했고 조금 축축했고 어쩐지 마음이 편안해져서 여자는 섬사람들을 땀냄새로 기억했다. 그리고 섬사람들은 물 가운데에 박힌 조그만 땅에 사는 사람들이라기보다 초원 한가운데에 모여사는 사람들처럼 느껴졌는데, 무려 ‘섬’ 사람들인데도 그들의 얼굴에서 바다의 낯빛을 발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한동안 그 사실이 어색하고 이상해서 섬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바다의 흔적을 찾으려 애를 썼는데도 보이지 않았다. 여자가 눈을 감은 것인지 어떤 손이 여자의 눈을 가린 것인지 알 수 없으나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 섬에 사람들이 살고 있고, 이따금씩 그 사람들을 떠올리는 일이 좋았고… 어쩌면 섬사람들이 바다였을지도….


여자는 시골에서 살고 싶지 않다고 단언하고는 했다. 시골에 전원주택을 짓고 살고 싶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으나 채 서른이 되기도 전에 도시를 사랑한다는 것과 도시생활에 최적화되어 있다는 것과 도시를 벗어날 수 있을 만큼 부지런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엇보다 시골에는 도시보다 훨씬 다양한 종류의 벌레가 엄청나게 많다는 것이 결정적인 이유였다. 그래도 시골에 방문하는 것, 시골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 시골에 최적화된 사람들이 자신의 일상을 이어가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은 좋아했다. 여자에게 시골은 그런 ‘대리’ 만으로도 충분한 것이었다. 시골 사람들*도 많은 ‘대리’ 중 하나다. 시골 사람들은 뭣 모르는 ‘도시 촌년’이 가질 법한 편견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사람들이었으나 편견보다 훨씬 다채로웠다. 도시  촌년의 편견은 공간의 차이만으로 만들어진 것이어서, 편견이라고 단정 짓기에는 좀 부족했지만 편견이 편견 아닌 것으로 둔갑할 수는 없으니…. 아무튼 여자는 시골 사람들을 기리는 글을 쓸 만큼 우리 동네 이야기 참조━ 그들을 너무나 좋아했다. 섬사람들을 생각나게 하는 게 후각이라면 시골 사람들을 떠올리게 하는 건 감정적인 청각, 캘캘거리는 소리였다. 여자는 시골 사람들을 생각하면 유쾌해졌다. 그들 모두 유쾌한 사람도 아니었고 그들의 일상이 늘 유쾌한 것도 아니었지만 유쾌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여자는 시골과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유쾌함을 잃어버릴 것 같다는 되지도 않는 핑계로 시골과 거리를 둘 수 있었다.


앞서 이야기했듯 여자는 시골보다 도시가 좋았다. 사람 많은 곳이 그렇게 싫고 또 체머리를 흔들면서도 사람이 바글바글한 도시를 떠나는 일이 드물었다. 시골이나 도시나 어떤 사람은 나쁘고 어떤 사람은 좋고 어디 살든 알지 못하는 것은 공간이나 사람이나 무엇이나 그 자체로 두려운 것이니 그나마 좀 덜 모르는 도시가 차라리 편했던 것이다. 탐구정신이 매우 부족한 여자이다 보니 더더욱. 어쨌든 이 도시 사람들*은 많고 많은 도시 중에 서울이라는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다. 굳이 시골과 도시를 비교하는 것은, 그것이 즐거움이든 비참함이든, 생각해보니 부질없는 일이다. 비참하기로 하면 어디든 늘 비참했고, 즐겁기로 하면 어디서든 늘 즐거웠고, 비참한 것을 즐기기로 하면 캘캘거리며 웃을 수 있었고 즐거운 것을 비참하게 여기기로 하면 길바닥에서 만 원짜리를 주워도 비참할 뿐이니까. 무엇을 이야기하든 굉장히 부질없는 상황이 되어버렸지만 굳이 한마디 거들자면 도시 사람들은 딱 가운데에 서 있는 사람들이 아닐까 싶다. 즐거울 것인지 비참할 것인지, 즐거운 것을 비참히 여길 것인지 비참한 것을 즐거이 여길 것인지 고민하는 그 고민의 딱 가운데에서 이렇게도 저렇게도 할 수 있는 그런. 도시가 그렇다. 특히 서울이라는 도시가 그렇다. 사람을 자꾸 갈팡질팡하게 만든다. 갈팡질팡하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 해도 갈팡질팡하다 이렇게 되도록 둘 수밖에 없는 곳이 도시다.


고백하자면 여자는 늘 ‘아들’을 원했다. 아들이 되어야 했고, 그게 싫어서 대체할 수 있는 아들이 있었으면 했고, 아들이 만든 세상이어서 아들만 대우를 받았고, 어떻게든 한자리 얻으려면 아들처럼 입고 먹고 생각하고 행동해야 했기 때문에 여자의 의지와 상관없이 여자는 늘 아들을 원했고 원해야 했다. 아들은 모두 누군가의 ‘씨’에서 태어난 것이라 모두 종자에만 관심을 가졌는데, 사실 종자보다 ‘땅’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아무도 하지 못했다. 이 대목에서 여자는 늘 욕지기가 일어 참을 수 없었다. 아들처럼 입고 먹고 생각하고 행동하기 위해 늘 짧게 잘라야 했던 ‘머리카락’에게 너무나 미안했으며, 이유도 모른 채 잘려야 했던 수많은 머리카락들에게도 너무나 미안했고, 이걸 어째야 하나 싶어 헛헛한 마음을 쓸어내리고 있던 차에 최근 유기농이니 친환경이니… 어쨌든 땅이 건강하고 땅이 살아 있어야 종자를 제대로 키울 수 있다는 바람이 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짹짹이’에는 건강한 땅에서 자란 온갖 종자들의 싱그럽고 찬란한 자태를 찍은 사진들이 도배되기 일쑤였기 때문에 여자는 다른 누군가의 아들들도 속히 이 바람에 올라탔으면 싶다. 그러나 아들들은 어찌나 무지한지… 어지간해서 험담하고 싶지 않으나 험담할 수밖에 없을 만큼 ‘무지함’의 비중이 너무나 커서… 뭐… 어쨌든,

그 수많은 누군가와 누군가의 아들들 중에 이 아들*은 뭐랄까 많이 안타까운 “사람”이었다. 한때 여자는 종교에 매우 큰 관심을 가지고 아주 조금, 적극적으로 활동하기도 했는데 그것은 반항하기 위해서 반항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했던 활동들이었다. 게다가 그 활동들은 ‘허례허식’이 한창 좋을 나이, 사춘기에 반짝 일었던 감정이었다. 그 반짝한 기간을 지나서도 한동안 여자는 아들과의 만남을 이어갔는데, 이유는 단순했다. 반짝한 기간이 끝났어도 여전히 반항할 곳이 필요했고 반항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줄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아들은 차분하게 여자의 반항을 다 받아주었고, 지켜봐 주었고, 반항의 기술━어찌 보면 이 아들이야말로 반항으로 만렙 찍은 아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을 알려주기도 했다. 훗날 여자가 여러 宗敎 중에서도 敎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아들과의 만남이 제법 괜찮은 ‘땅’이 되어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낯선 도시*에 대한 이야기는 생략할 참이었다. 좋지 않은 기억이 얽혀 있어 도시에 대한 기억 대부분이 지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기억을 들추려면 좋지 않은 것까지 들춰내야 했기 때문에 생략하고 싶었다. 생략하고 싶다는 생각마저 좋지 않게 느껴졌고, 여자는 생각에 쉽게 휘둘리는 편이었기 때문에 또 한동안 가라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가라앉은 김에 가만히 앉아 생각하다 우울이 차고 넘치던 도시 하나가 떠올랐다. 낯설기는 매한가지였고, ‘낯선 도시’가 비롯된 곳이기도 했으니 우울이 차고 넘치던 도시 이야기나 조금 풀어내는 것으로 낯선 도시 이야기를 대신한다.

우울이 차고 넘치던 도시는 프라하다. 없는 거 없는 도시인데도 참 쓸쓸하기만 하던 도시였다. 고작 2박 3일 머물렀으나 2년 3개월 머무른 것처럼 깊었다. 낮은 낮대로 밤은 밤대로 그 자그마한 도시는 시종일관 우울했고, 여자는 우울에도 참 많은 색깔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프라하는 여자에게 너무 소중해서 깊이 넣어두고 잊어버린 도시다. 어쩌면 ‘잃어버린’ 도시일지도. 


철수*… 라는 남자를 알고 있’었’다. 눈치챘겠지만 과거형이다. 지금은 모른다. 그저 대명사일 뿐인 철수는 그저 손가락일 뿐 내 손가락은 아니었기 때문에 과거에 남겨두기로 했다.


도요새*는 가까운 이가 선물해주었다. 자그맣고 단단한 차돌 같은 그이가 마음을 달래줄 거라고 선물해준 새다. 새는 한꺼번에 백 개의 나이를 먹고 百壽 도요새가 되었는데, 여자가 별명으로 삼고 있는 百修와 발음이 비슷해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그 울음이 좀 기이하달까, 거슬린달까… 듣기에 거북스러워 이내 새장 밖으로 날려 보내 주었다. 도요새의 시간이 가벼웠던 것인지 여자의 시간이 무거웠던 탓인지 알 수 없으나 ‘시간’은 때로 자석의 상극과 같아 만나기만 하면 서로 밀어내지 못해 안달이었다.


여자는 한동안 지하철을 고집스레 기차라고 불렀다. 워낙 이 말, 저 말, 가지고 놀기를 좋아했던 터라 사물의 이름을 저 혼자 바꿔 부르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지만 돌이켜보면 지하철 대신 기차를 타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특히나 초록색 기차*는 꼬리를 문 뱀처럼 돌고 돌아서 원심력에 밀려 원 밖으로 튕겨져 나가거나 관성에 떠밀려 계속 따라 돌거나 둘 중에 하나를 골라야 했기 때문에 더더욱 기차를 타고 싶었을 게다. 7년 전, 여자는 스스로 원심력에 떠밀려나기로 작정했고, 7년 만에 다시 관성의 힘에 따라야 할 때가 왔다고 느꼈다. 어차피 새가 이 기류 저 기류 바꿔 타고나는 것이나, 물고기가 이 해류 저 해류 갈아타며 헤엄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여자는 차라리 새나 물고기가 되고 싶었다.


고 씨네* 사람들은 살면서 한 번쯤 만나야 하는 사람들이라고 했고, 한 번쯤 만나게 될 사람들이라고도 했다. 그래서 여자는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라면 하고 후회하자는 마음으로 오며 가며 고 씨네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35번지로 데려왔다. 어쨌든 후회로 남은 사람들이었다. 후회는 다분히 부정적이었지만 여자에게 후회는 부정적이지만은 않았고 어떤 것은 굉장히 후련한 것이기도 했다. 어쨌든 고 씨네 사람들은 후회로 남았다.


404호에 피신 중인 나무 액자*는 원래 406호 현관에 달려 있었다. 여자의 스승에게서 받은 액자였는데, 하필이면 고양이들의 눈에 들었다. 고양이들은 인간이 소중히 여기는 것을 기가 막히게 알아채고 관심을 둔다. 인간을 괴롭히기 위해서든, 단순한 호기심이든 그 물건은 열에 아홉, 망가지기 일쑤다. 그 덕에 액자는 여러 차례 바닥으로 내동댕이 쳐졌고 그 덕에 프레임 하나가 떨어졌다. 순간접착제 같은 것으로 붙이면 그만이었으나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저 모서리에 잘 맞춰 떨어진 나무 조각을 잘 끼워 맞춘 다음 그대로, 한 권의 책처럼 404호로 옮겨두었을 뿐이다. 어떤 것도 책이 될 수 있었다. 책은 낡고 헤져도 그 모습 그대로 가치 있는 것이었다.



404호 사람들

섬사람들 : 그 섬에 가고 싶다 / 임철우 / 살림 / 초판 18쇄 1997년 4월 25일 / 6,000원

시골 사람들 : 우리 동네 / 이문구 / 민음사 / 개정판 1쇄 1997년 2월 20일 / 8,000원

도시 사람들 : 서울특별시 - 2003년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 김종은 / 민음사 / 1판 1쇄 2003년 5월 30일 / 8,000원

아들 : 사람의 아들 / 이문열 / 민음사 / 3판 19쇄 2001년 6월 11일 / 7,000원

낯선 도시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밀란 쿤데라 / 이재룡 / 민음사 / 1판 28쇄 2007년 10월 1일 / 7,500원

철수 : 철수 사용 설명서 - 2011년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 전석순 / 민음사 / 1판 1쇄 2011년 7월 1일 / 11,000원

도요새 : 약해지지 마 / 시바타 도요 / 채숙향 / 지식여행 / 초판 30쇄 2011년 3월 25일 / 9,900원

초록색 기차 : 을지로 순환선 / 최호철 / 거북이북스 / 초판 2쇄 2008년 4월 9일 / 18,000원

고 씨네 : 변신 · 시골의사 / 프란츠 카프카 / 전영애 / 민음사 / 1판 6쇄 2001년 4월 20일 / 6,500원 § 토니오 크뢰거 · 트리스탄 / 토마스 만 / 안삼환 외 / 민음사 / 1판 4쇄 2001년 3월 15일 / 9,000원 § 호밀밭의 파수꾼 /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 공경희 / 민음사 / 1판 1쇄 2001년 5월 30일 / 7,000원 § 바덴바덴에서의 여름 / 레오니드 치프킨 / 이장욱 / 민음사 / 1판 6쇄 2009년 8월 10일 / 9,000원 § 이피게니에 · 스텔라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 박찬기 외 / 민음사 / 1판 29쇄 2014년 6월 16일 / 9,500원 § 파리대왕 / 윌리엄 골딩 / 이덕형 / 문예출판사 / 2판 1쇄 1999년 6월 10일 / 7,000원 § 설국 · 이즈의 무희 · 금수 / 가와바타 야스나리 / 장경룡 / 문예출판사 / 3판 1쇄 1999년 9월 10일 / 5,000원 § 오이디푸스 왕 · 아가멤논 · 코에로포이 · 안티고네 / 소포클레스 · 아이스퀼로스 / 천병희 / 문예출판사 / 2판 2001년 2월 25일 / 8,000원

그리고 피신 중인 나무 액자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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