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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 Apr 20. 2017

405호 : 人問

백수동 35번지 이야기

百修洞 三十五番地 斷面圖 · 백수동 35번지 단면도


405호는 콩나물시루를 생각나게 한다. 빽빽하게 서 있는 콩나물처럼 마른 사람들이 차곡차곡 제 몸을 포개고 산다. 또 콩나물시루에 검은 천 덮어 놓는 것처럼 405호 문 앞은 이런저런 잡동사니 때문에 입구가 거의 덮이다시피 해서 들어가자면 몸을 이리 비틀고 저리 꼬아야 한다. 그 덕에 405호는 온기가 샐 틈이 없었고, 405호 앞에 서면 비닐하우스에 들어섰을 때처럼 더운 기운이 코 끝을 튕기곤 했다.


모과 씨*는 모과나무 열매의 씨가 아니다. 어떤 사람의 이름이 ‘모과’인 것뿐이다. 여자는 아직도 모과 씨의 눈빛이 기억난다. 모과 씨의 눈빛은 한 사람의 생김을 모두 지워버릴 만큼 또렷했다. 굉장히 많은 것이 담긴 눈빛이었는데 그렇다고 또 앞에 놓인 것들을 마구 찌르려는 듯 날카로운 것은 아니었고, 이상하리만치 ‘온도’가 느껴지지도 않았고, 마주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상대를 부끄럽게 만드는 눈빛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또, 그저 ‘단단하다’라고만 설명하기에도 아쉬운 눈빛이었고, 어떤 상상도 허락하지 않는 눈빛이었다. 그 눈빛 속에 담긴 이야기들은 그림자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었고, 그 생각 속에 어떤 감정도 담을 수 없게 만들었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각성하게 만들기도 했다. 쓰고 보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은데 모과 씨의 눈빛은 ‘어떻다’고 단정 지을 수 없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 힘이 모과 씨의 발자국을 흩뜨리지 않는 것 같다. 누군가에게 따라오라고 권하는 발자국은 아니었지만 또렷한 발자국을 남기면서 모과 씨는, 아니 모과 씨의 눈빛은 지금도 계속 걷고 있다.


여자는 강박*이라는 애완 감정을 길러왔다. 아마 16년쯤, 어쩌면 그보다 좀 더 오래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이 애완 감정은 단호해서 좋고 싫음이 또렷했고, 그 호불호에 따라 갖춰야 할 또렷한 양식이 수두룩했고, 그 무수한 또렷함 들은 어딘가에 반사된 햇빛처럼 지나치게 날카로워 여자의 마음에 숱한 생채기를 내었다. 강박이 가장 잘 따랐던 것은 안타깝게도 여자가 아니라 문장이었다. 강박은 빛나는 문장을 사랑했는데 여자에게 강박의 취향은 도통 짐작할 수 없는 고양이의 취향과 같아서 도대체 빛나는 문장이 무엇인지, 어떤 문장을 디밀어야 강박이 만족할 수 있을지 알지 못해 답답한 나날들을 보내야 했다. 자꾸 보채는 강박을 어르고 달래다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마다 여자는 非文을 열고 나가 바람을 쐬었다. 보이지 않을 만큼 좁은 그 門아닌 文을 들락거릴 때마다 여자의 손 끝에는 가시가 박혔고, 손 끝에 박힌 가시를 빼느라 여자는 반나절을 꼬박 아무것도 못하는 때가 많았다. 그렇게 십 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강박은 여자에게서 제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는지 어느 순간부터 대상을 바꾸었다. 문장에서 낱말로, 혹은 사람으로 때로는 시간으로 어느 때는 감각으로…. 그때마다 여자는 애완 감정에게 휘둘렸고, 흐릿해진 주종관계를 어떻게든 바로 잡으려 애를 썼지만 이미 여자가 강박인지 강박이 여자인지 애매모호한 지경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애완 감정 따위에 휘둘리며 지내던 어느 날 여자는 제 손을 가만 바라보았는데, 그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분명 손에 쥐고 있다고 생각했던, 애완 감정의 목에 걸어주었던 목줄이 없었다. 손은 비어 있었고, 빈 손을 한동안 바라보던 여자는 처음부터 그런 애완 감정 같은 것은 없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머리*는 네 발 달린 짐승의 머리가 아니라 이야기의 머리다. 한 사람의 마음속에 가득 찬 어떤 생각의 가장 첫머리에 있는 단어의 첫 번째 자음이라고, 굳이 설명하자면, 그렇게 설명할 수 있을 텐데 쓰고 보니 ‘손가락’으로 ‘장난’을 친 것과 다름없어 머쓱하다. 아무튼 여자는 오래도록 이 말머리에 대해 생각해왔다. 하루에 한 번, 일주일에 한 번, 한 달에 한 번, 계절마다 한 번, 일 년에 한 번… 그렇게 정기적으로 생각하는 생각들 중 하나였다. 말머리에는 무엇이 담겨 있는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하물며 그것은 여자 자신의 것이었는데도!━ 그 때문에 여자는 말머리를 분자 단위까지 쪼갰다가 다시 조립하곤 했다. “조립”이라는 게 그렇듯, 다시 조립한 말머리 주변에는 늘 어디서 빠졌는지 모를 나사나 볼트 한두 개가 남아있고는 했다. 그래서 어느 날, 그 날 여자의 ‘말머리’는 불붙은 마음이었기 때문에 여자는 말머리에게 적합한 진화 방법에 대해 물었다. 말머리는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고 비어 있으나 가득 차 있고 가득 차 있지만 비어 있는 것으로 끌 수 있다고 답했고, 여자는 ‘있다’, ‘없다’, ‘비다’, ‘차다’… 한 말머리의 곱셈으로 태어난 또 다른 말머리들의 나사를 조였다 풀었다 하며 한 계절을 보냈다. 사칙연산만으로는 풀 수 없었던 그 수식은 여자에게 “안드로메다 행 티켓”과 같아 손에 쥐어지는 것 하나 없어도 즐거울 수 있었다. 그래서 여자가 가장 자주, 가장 공들여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 또, 말머리다.


어떤 물음표는 그저 그 생김을 가만히 바라보게 한다. 이 물음표*가 그렇다. 왼쪽에 찍힌 점이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슬쩍 위로 올라가는 듯하다 아래로 흘러내리며 짧은 직선을 긋고는, 제 할 일 다 했다는 듯 선과 조금 떨어진 곳에 점을 찍으면 완성되는 물음표의 모양은 생각을 잇지도 잊지도 못하게 하는 생김을 갖고 있다. 특히 이 물음표가 그렇다. 높았으면 싶다가 낮았으면 싶기도 하고 휘어잡고 싶다가도 휘어 잡히고 싶기도 하고, 뭐 그런 것들을 따져보고 톺아보고 고민해야 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어려운 일은 애써 고민할 것이 아니라 물음표 모양이나 지그시 바라보면서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이 좋을 때도 있다. 지겨워진 물음표가 고개 들고 허리 펴고 기지개 쭉 켜고 느낌표 될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리면 될 일이다.


여자는 살림꾼* 하나를 알고 있었다. 여자는 살림살이에 몰두했던 때 만난 사람으로, 틈날 때마다 만나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여자의 질문은 대개 한쪽으로 치우쳐 있었지만 그 살림꾼은 개의치 않고 차분히 일러주었다. 살림꾼이 여자의 관심사와 취향 대부분을 알게 될 무렵, 여자는 살림꾼과의 만남을 그만두었다. 살림꾼의 대답은 솔깃했지만 쫄깃하지 않아서 씹는 맛이 없었고 어찌어찌 씹을만하다 싶을 때쯤 단물이 다 빠져 종이조각을 질겅이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 선생*은 초등학교 5학년인 아이에게 중학교 1학년인 아이가 풀어야 할 문제집을 풀게 하는 욕심에 눈먼 부모 ━욕심에 눈이 먼 것인지 억지로 “관계”를 엮어 보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부모’라면 눈이 먼 경우가 더 많으니━ 혹은 과외 선생 같은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여자가 한 선생을 계속 만났던 것은 다행스럽게도 한 선생의 이야기에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들이 있었다. 뭔 말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뭔 말인지 알 것 같은 그것, 그런 말들이 호기심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던 것이다. 결국 호기심의 옆구리가 투둑, 터지는 바람에 더 이상 한 선생을 만날 수 없게 되었다는 게 아쉽다면 아쉬운 일이겠지만… 여자가 터진 옆구리를 꿰매다 만 것을 보면 그리 아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요즘 김밥에 조예가 깊은 김 선생도 있다고 하던데, 지금 이야기하려는 김 선생*은 김밥과는 상관없는 사람이지만 ‘맛’에 조예가 깊은 사람인 것은 분명하다. 게다가 김 선생은 한 선생과 달리 초등학교 5학년 아이에게 1년 전 풀었던 문제집에서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쳤던 우스갯거리 부록을 다시 보여주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여자는 김 선생에게 홀딱 반하고 말았다. ‘금사빠’ 기질이 다분한 여자가 누구에게 홀딱 반하는 건 쉬운 일이었지만 여자의 마음을 오래 붙들어 두는 건 그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기도 했다. 헨젤과 그레텔이 과자 조각을 따라 과자집까지 갔던 것처럼, 여자에게도 ‘과자 조각’이 필요했다. 처음 집어 든 과자의 맛도 중요했고, 목적지까지 드문드문 놓인 과자의 맛을 유지하는 것도 중요했다. 김 선생은 이 과자 조각을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떨어뜨려 놓았고, 여자는 여태까지도 과자 조각을 따라가는 중이다.


굉장히 한적한 국도에,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있는 줄도 모르는 길 위에 휴게소가 하나 있었다. 우연히 들른 그 휴게소에서 만난 점원*은 대단히 친절했다. 하지만 친절이, 만사형통은 아니다. 친절이라는 것이 안락사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알고 난 다음부터, 친절을 원하는 만큼 경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이별하는 것들이 친절할 수만은 없다. 어느 것 하나, 관점을 벗어나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어느 것 하나 관점에 갇히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405호 사람들

모과 씨 : 대한민국 원주민 / 최규석 / 창비 / 초판 4쇄 2009년 5월 20일 / 11,000원 § 100℃ : 뜨거운 기억, 6월 민주항쟁 / 최규석 / 창비 / 초판 1쇄 2009년 6월 5일 / 12,000원 §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 최규석 / 길찾기 / 초판 11쇄 2009년 2월 25일 / 8,800원 § 습지생태보고서 / 최규석 / 거북이북스 / 초판 8쇄 2009년 2월 23일 / 9,800원

강박 : 문장강화 / 이태준 / 창작과평사 / 초판 16쇄 2000년 6월 5일 / 5,000원

말머리 : 무문관, 혹은 "너는 누구냐" / 한형조 / 여시아문 / 1판 4쇄 2008년 2월 22일 / 8,000원

물음표 : 한국 문학의 위상 / 김현 / 문학과지성사 / 1판 3쇄 2002년 4월 26일 / 5,000원

살림꾼 : 살림지식총서 / 변신 이야기 - 필멸의 인간은 불멸의 꿈을 꾼다 / 김선자 / 살림 / 초판 2003년 7월 15일 § 뱀파이어 연대기 / 한혜원 / 살림 / 초판 2004년 12월 30일 § 아도르노 - 고통의 해석학 / 이종하 / 살림 / 초판 2007년 6월 5일 § 에로 그로 넌센스 - 근대적 자극의 탄생 / 소래섭 / 살림 / 초판 2005년 1월 30일 § 주역과 운명 / 심의용 / 살림 / 초판 2004년 10월 30일 § 색채의 상징, 색채의 심리 / 박영수 / 살림 / 초판 2003년 8월 15일 / 각 권 3,300원

한 선생 : 피로사회 / 한병철 / 문학과지성사 / 1판 27쇄 2013년 9월 27일 / 10,000원 § 투명사회 / 한병철 / 문학과지성사 / 1판 2쇄 2014년 3월 14일 / 12,000원 § 심리정치 / 한병철 / 문학과지성사 / 1판 2쇄 2015년 3월 3일 / 11,000원 § 에로스의 종말 / 한병철 / 문학과지성사 / 1판 3쇄 2015년 10월 14일 / 10,000원

김 선생 : 동사의 맛 / 김정선 / 유유 / 초판 2쇄 2015년 6월 4일 / 12,000원 §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 / 김정선 / 유유 / 초판 2쇄 2016년 2월 24일 / 12,000원

점원 : 휴게소 / 정미진 / 구자선 / at noon books / 초판 2쇄 2016년 3월 31일 / 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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