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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 Apr 30. 2017

406호 : 雲紋

백수동 35번지 이야기

百修洞 三十五番地 斷面圖 · 백수동 35번지 단면도



여자는 뜬구름이 좋았다. 포근하기만 할 것 같은 구름이 사실 엄청 차갑다는 것을 알고 나서도 하늘에 뜬 구름이 좋았다. 까마득한 높이까지 올라간 물방울들이 다시 땅으로 내려오기 전까지 모여서 쉬어가는 휴게소 같은 구름. 바람 하고는 더없이 친하고 달과는 애틋하게 친하고 태양과는 장난스레 친한 구름. 여자도 뜬구름을 잡고 싶었는데 그러기에 여자는 산만했고, 그래서 여자는 山紋을 찾아다니기로 했다. 그렇게 등산을 싫어하면서 그토록 산 그림자를 찾아다니는 것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여자는 뜬구름을 잡는 대신 뜬구름이 남겨 놓은 발자국들을 406호에 모아 놓았다. 갖가지 구름무늬가 폭신폭신하게 채워져 있었다. 여자가 406호 구석구석 촘촘히 새겨 넣은 구름무늬는 시도 때도 없이 외로운 여자에게 어깨를 내주었다. 가끔은 손을 잡아주기도 했고 어느 때는 여자의 가슴에 매달린 흠뻑 젖은 스펀지를 꾹, 짜서 볕에 널어주기도 했다. 그래서 여자는 406호의 구름무늬를 볼 때마다 ‘참말 곱다’고 중얼거렸다.


매지구름무늬*는 여자가 붉은 잉크로 새겨 넣은 것이다. 실바람에도 소스라치게 놀라곤 하던 십대 끝무렵, 마음을 이겨 만든 붉은 잉크로 새겨 넣은 무늬다. 영롱하기까지 했던 그 무늬는 이제 빛이 바래버려 탁한 갈빛으로 변해버렸다. 손안에 넣고 쥐면 금방이라도 붉은 잉크가 뚝뚝 떨어질 것만 같던 매지구름은 바싹 말라 무늬로 남았다. 그렇게 바래고 흐려졌어도 한 때 구름 모양이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열구름무늬*는 바람이 이끄는 대로 지나가는 구름들이 남긴 발자국이다. 사부작사부작 걸어간 구름이 찍어 놓은 발자국이 406호 벽에도 오종종히 찍혀 있다. 어느 때는 저것이 구름인지, 구름이 남긴 발자국인지 알아보기 힘들지만 ‘지나간 것’이니 저 무늬가 구름인지 구름의 발자국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지나갔다는 것을 기억할 만큼의 흔적을 남겨두었으면 그것으로 되었다.


이렇게 보고 저렇게 보아도 예쁜 구름. 이렇게 보고 저렇게 볼 때마다 빛깔이 달라지고 보지 못했던 빛깔이 보여서 하염없이 바라보게 되는 구름을 가져다 돋을새김으로 새겨 넣은 무늬가 자개구름무늬*다. 비장하기도 하고 처연하기도 한 그 무늬는 이러나저러나 슬프지만 예쁘다. 이쯤 되면 예뻐서 슬픈 것인지 슬퍼서 예쁜 것인지 아리송해지지만 그래도 예쁘다. 빛을 받으면 눈부신대로 빛이 없으면 어두운 대로 끝과 끝을 오가는 슬픔이어서 예쁘다.


서른 되던 해에 새겨 넣은 위턱 구름무늬*는 사실 흘레 구름무늬가 될 뻔했다. 위턱이나 흘레나 영 마뜩잖았지만  ━순전히 글자 모양도 발음도 영 못났기 때문이다━ 정성껏 새겨 넣었다. 기다리던 서른을 기념하고 싶었다. 서른이 되기만 하면 무엇이 되었든 어쨌거나 멋진 모습일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무엇이 될 수 있을지 여전히 알 수 없었고, 그래도 내일이 어떤 모습일지는 짐작할 수 있었던 직장마저 그만두고 나니 더더욱, “K100” 보다 더 까매져버린 미래에 무엇도 그릴 수 없었다. 아니, 그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여자는 “빌어먹을.” 하고 씨 뿌리듯 씨불거릴 수밖에 없었다. 말이 씨가 되고 싹을 틔우는 바람에 여자는 여태 빌어 먹고 산다. 다행히도 여자는 별 욕심이 없었고 ━사실 여부를 확인해봐야 한다. 여자가 버릇처럼 집 한 칸 있었으면, 어디서든 따박따박 월 300쯤 들어왔으면 참말 좋겠다, 하고 중얼거리는 것을 본 고양이가 두 마리나 된다━ 남의 주머니에서 돈 꺼내는 게 세상 어려운 일이라는 것과 남의 주머니에서 돈 꺼내는 재주 같은 것은 애초에 갖고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빌어 먹고사는 것도 살만하다 여기며 살고 있다. 마흔이 되고 쉰이 되고 예순이 되어도 그 나이에 닿을 때까지 ‘미래’라는 것은 내내 어두컴컴할 테고 그 나이에 닿더라도 그다지 밝아지진 않겠지만 어제에 내일을 이어 붙이는 것을 그만 둘 수가 없어서 빌어 먹고 산다. 그렇게 자꾸 입에다 빌어온 풀을 칠한다. 그래서 자꾸 말을 아끼게 되나 보다.


무지개 구름무늬*는 색으로 시작해 색으로 맺을 무늬다. 일곱 개의 색깔을 하나하나 결대로 나누고 깨끗한 물에 헹구어 볕에 말린 다음 정성껏 꾹꾹 눌러가며 다림질한 색깔로 새기고 있는 무늬다. ‘있는’이라고 진행형으로 쓴 것은 아직 마무리짓지 못한 무늬이기 때문이다. 다른 무늬들이 다 그렇지만 유독 무지개 구름무늬에만 진행형을 쓴 것은 그만큼 ‘빛깔’에 거는 기대가 크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는 빨강에서 나온 어두운 노랑이고 저기는 보라에서 나온 검정이고 또 이쯤에는 초록에서 나온 주황이 새겨질 것이다. 여자는 예쁜 것들이 좋았다. 예뻐서 좋았다. 이래서 예쁘고 저래서 예쁘고 결국 개나 소나 ━하지만 정말로 진짜로 ‘개’나 ‘소’가 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진짜로, 정말로━ 다 예쁜 것이 될지라도 예쁜 것이라면 다 좋았다. 

 

매일 매 순간 이정표가 절실했던 때 새겨 넣은 거친 물결구름무늬*는 오소소 소름이 돋도록 섬짓한 무늬다. 진짜 있는 것인가 싶게 비현실적인 모습의 그 구름은 여자가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를 일러주었다. 그 흔한 화살표 하나, 목적지 하나 없이 길잡이 노릇을 해냈다. 어디론가 가고 싶어 하지 않았으므로 그저 어디에 서 있는지만 알려주면 되었고, 그래서 구름은 그저 그 모습 그대로 닻을 내리고 있기만 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쉴 새 없이 휘몰아치는 수면 위에서 가늠할 수 없이 깊은 곳에 보이지도 않는 닻을 내리고 팔자에도 없는 부표 노릇을 하느라 바람에 시달린 구름의 머리칼은 마구 헝클어졌고 그 때문에 더 섬짓한 기운을 뿜어냈지만 여자가 바라던 역할을 해내는 데 모자람 없었다.


모루 구름무늬*는 작은 오솔길을 걷다가 본 구름을 새겨 넣은 것이다. 구름은 때로 땅 위의 어떤 것을 흉내 내었다. 완전히 똑같이 흉내 낼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제 몸에 비친 땅 위의 것들을 제 마음대로 흉내 낸 것인데, ‘종이’가 남달랐기 때문인지 모루 구름에 새겨진 땅 위의 것들은 어색하지 않고 어여뻤다.



406호 사람들

매지구름무늬 : 제14회 소월시문학상 작품집 - 사랑으로 나는 외 / 김정란 외 / 문학사상사 / 초판 4쇄 1999년 9월 13일

열구름무늬 : 너무나 얇은 생의 담요 / 황학주 / 세계사 / 초판 2002년 1월 2일 § 나무고아원 / 최문자 / 세계사 / 초판 1쇄 2003년 11월 7일 § 삼천갑자 복사빛 / 정끝별 / 민음사 / 1판 1쇄 2005년 4월 15일 § 지독한 초록 / 권자미 / 애지 / 초판 1쇄 2012년 5월 29일 § 나는 상처를 사랑했네 / 최두석 박수연 엮음 / 1판 1쇄 2012년 7월 30일

자개구름무늬 :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 김경주 / 랜덤하우스중앙 / 초판 2쇄 2006년 9월 5일 § 오동나무 안에 잠들다 / 길상호 / 문학세계사 / 초판 1쇄 2004년 6월 25일 § 시클라멘 시클라멘 / 정수경 / 한국문연 / 초판 2015년 11월 18일 

위턱 구름무늬 : 설운 서른 / 김종길 외 / 버티고 / 초판 1쇄 2008년 5월 20일

무지개 구름무늬 : 문학동네 시인선 - 요즘 우울하십니까? / 김언희 / 초판 2011년 4월 15일 § 방독면 / 조민호 / 초판 2011년 6월 20일 § 거짓말처럼 맨드라미가 / 이승희 / 초판 2012년 10월 31일 §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 며칠은 먹었다 / 박준 / 1판 1쇄 2015년 2월 13일 § 구름과 집 사이를 걸었다 / 박지웅 / 초판 2012년 12월 10일 § 라이터 좀 빌립시다 / 이현호 / 초판 2014년 6월 8일 § 아름답고 쓸모없기를 / 김민정 / 1판 5쇄 2016년 11월 20일 § 우리의 죄는 야옹 / 길상호 / 초판 2016년 11월 30일

거친 물결구름무늬 : 문학과지성 시인선 - 우리들의 음화 / 김혜순 / 재판 3쇄 2003년 7월 14일 § 황금빛 모서리 / 김중식 / 10쇄 2003년 11월 19일 § 한 잔의 붉은 거울 / 김혜순 / 3쇄 2005년 4월 22일 § 쨍한 사랑 노래 / 박혜경 이광호 엮음 / 2쇄 2005년 7월 14일 § 음악처럼 스캔들처럼 / 이민하 / 2008년 5월 23일 § 기담 / 김경주 / 2008년 10월 31일 § 오십 미터 / 허연 / 2016년 2월 11일 § 어떻게든 이별 / 류근 / 초판 4쇄 2016년 10월 4일

모루 구름무늬 : 창비시선 - 어느 별에서의 하루 / 강은교 / 초판 5쇄 2001년 10월 25일 § 호랑이 발자국 / 손택수 / 초판 5쇄 2004년 4월 15일 § 마징가 계보학 / 권혁웅 / 초판 5쇄 2007년 5월 23일 § 저녁을 굶은 달을 본 적이 있다 / 이승희 / 초판 2쇄 2007년 12월 20일 § 바람의 사생활 / 이병률 / 초판 10쇄 2010년 3월 20일 § 와락 / 정끝별 / 초판 1쇄 2008년 11월 10일



구름무늬들

매지구름 : 비를 머금은 검은 조각구름

열구름 : 떠가는 구름, 지나가는 구름

자개구름 : 20~30km 높이에서 나타나는 진주색 구름. 고위도 지방에서 일출, 일몰 때에 볼 수 있다.

위턱 구름 : 상층운으로 햇무리나 달무리를 이루는 구름.

흘레 구름 : 비를 내리려고 엉기기 시작하는 구름.

무지개 구름 : 햇빛을 받아 무지갯빛으로 물든 구름

거친 물결구름 : 구름이 파도처럼 물결치는 구름. 생김새가 괴이하여 악마 구름이라고도 함.

모루 구름 : 적란운의 윗부분에 나타나는 모루 또는 나팔꽃 모양의 구름.


* 구름무늬에 대한 설명은 네이버 블로거 ‘꿈꾸는 인’님이 정리한 “구름 순우리말 이름”을 엿보고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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