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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 May 31. 2017

別堂 : 옥탑

백수동 35번지 이야기

百修洞 三十五番地 斷面圖 · 백수동 35번지 단면도


옥탑에 사는 사람들은 풍찬노숙을 하는 사람들이다. 35번지에서 못 가는 곳이 없는 두 고양이들에게 유린당하다시피 하며 ━고양이들의 입장에서 그들은 한낱 발판에 지나지 않았다━ 지내면서도 다른 곳으로 떠날 생각도 않고 묵묵히 지낸다. 마치 밟혀야 살 수 있다는 듯이. 


기억나지 않는 기억 속에 여자는 타자기를 하나 가지고 있었다. 어쩌다 갖게 되었는지 여자의 것이 맞는지 타자기라는 것을 잠시나마 갖고 있기는 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여자는 타자기를 갖고 있었다. 낡은 타자기, 실제로 사용할 수 없었지만 자판을 꾹꾹 눌러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타자기, 끈처럼 생긴 잉크를 구해야 하는데 구할 길이 없어 난감하던 기억, 타자기로 찍어내는 뭉툭한 글자들… 대체 이 기억이 왜 생긴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분명한 것은 여자가 타자기를 좋아한다는 것. 그래서 한때 기계식 키보드를 사용했다는 것. 노트북을 쓰면서, 노트북에 할당된 공간이 대폭 줄어들면서 그마저도 쓸 수 없게 되었지만 타자기라든가 기계식 키보드에 대한 애착은 여전하다는 것. 그러던 어느 날 여자는 타자기로 찍어낸 듯한 원고 한 편을 보게 되었고, 타이피스트*를 수소문해 만났다. 그러나 타자기에 대한 여자의 마음과 타이피스트에 대한 마음은 완전히 다른 것일 수밖에 없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타이피스트는 매력적이었지만 매력적이지 않은 이야기들을 주절거렸기 때문이었다. 매력적인 것은 타이피스트의 재능이었고 매력적이지 않은 것은 여자의 부족함이었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부족함이 메워지는 날이 오면 타이피스트를 한 번 더 만날 생각이다. 


여자는 늘 사람이 궁금했다. 대체 사람은 어떤 존재이기에 이렇게나 무모하고 폭력적인지 ━폭력이라는 것도 물리적인 힘에만 한정되었으면 좋았으련만 배타, 아집, 독선… 뭐 안 좋다 싶은 것들은 죄다 때려 넣고 섞어 놓았는지━ 궁금했다. 여자는 또 사람이 궁금하지 않았는데, 그저 엮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전생에 무슨 업보를’로 시작하는 푸념을 늘어놓게 되는, 얽히고설킨 인연과 인연들에게 ‘제발 나를 혼자 두시오’라고 외치고 싶을 때 부디 다음 생에는 사람 같은 것 말고 고양이로 태어났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게 되는 것이다. 사람을 향한 물음에 답을 찾을 수 있을까 싶어 ‘인간시장’에 나갔던 날, 밟혀야 사는 사람들*을 만났다. 뭐, 잔디도 아니고 어쩌다 밟혀야만 살아갈 수 있게 되었는지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여자는 털썩 자리에 주저앉아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들은 주저앉은 여자를 에워싸고 ‘선 채로’ 돌아가며 한 마디씩 자신들의 이야기를 보태었다. 그들이 보탠 말들은 생각보다 꽤 무거웠기 때문에 여자는 이 말 무더기 속에서 ‘산채로’ 빠져나갈 수 있을지, 조금 무서워졌다. 그들은 자신의 이야기가 끝나면 그 자리에 드러누웠는데, 여자가 돌아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그들을 밟지 않고는 도무지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없을 만큼 빈틈없이 누워 있었다. 하는 수없이 여자는 그들을 밟으며 그 자리를 벗어날 수밖에 없었고, 최대한 적은 면적을 밟아 최대한 덜 아프게 하려고 온 신경을 곤두세워 발끝으로 걸어 나왔다. 간신히 빠져나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돌아보니 한 무리의 사람들이 밟혀야 사는 사람들을 우악스레 밟으며 지나가고 있었다. 밟혀야 사는 사람들의 얼굴은 환하게 빛나고 있었고, 그들을 밟는 사람들의 얼굴은 발갛게 홍조를 띠고 있었다. 마치 관객석으로 다이빙하는 록스타처럼, 뛰어든 록스타를 관객석 끝으로 다시 무대로 떠받들어 옮기는 관객처럼, 각본은 없지만 잘 짜인 각본이 있다는 듯이… 밟고 밟히는 그들은 꽤나 재미있어 보였다. 하지만 여자는 조용한 것이 좋았고, 사람이란 어차피 알다가도 모를 것, 물길보다 알기 어려운 것이었으니 굳이 밟고 밟히지 않아도 괜찮았다. 


뜯어보면 매력적이고 잘생기고 딱히 흠잡을 곳 없어 보이는데, 그건 둘째치고 이렇다 할 접점━취미라든가 관심사라든가 학연이나 지연, 혈연 같은━이 없는데도 어쩌다 같이 사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도 여자가 들어와 살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아무도 몰래 들어와 원래 그곳에 살고 있던 것처럼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처음에 여자는 그들에게 들어와 살아달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었는지 한참을 고민했었다. 그러나 고민한들, 들어오라는 말도 없었는데 들어올 만큼 염치없는 사람들이 아니었으니 분명 여자가 들어오라 했을 테고 그랬다면 이제와 다시 나가랄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머물도록 두었다. 그래도 염치 있는 사람들이니 언젠가 월세 내는 셈 치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줄 수도 있을 테니까. 


탐험가*는 매일 ‘하루’를 쌓았다. 매일 똑같은 하루와 매일 다른 하루를 쌓았다. 오늘도 오늘치 하루를 쌓았을 탐험가처럼 어제 위에 오늘을 오늘 위에 오늘을 쌓는 수밖에 없으니 잊지 말고 매일 오늘을 쌓아야겠다고 다짐하는 여자였다.  



옥탑방 사람들

타이피스트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프리드리히 니체 / 최승자 / 청하 / 초판 20쇄 2000년 8월 10일 / 9,000원

밟혀야 사는 사람들 : 철학과 굴뚝 청소부 - 근대 철학의 계보들 / 이진경 / 그린비 / 초판 1쇄 2002년 1월 7일 / 12,000원 § 철학의 위안 / 움베르토 에코 / 조형준 / 새물결출판사 / 1판 3쇄 2005년 9월 5일 / 15,000원 § 철학의 바다에 빠져라 / 최진기 / 스마트북스 / 초판 2015년 5월 30일 / 15,000원

어쩌다 같이 사는 사람들 : 국화와 칼 - 일본문화의 틀 / 루스 베네딕트 / 김윤식·오인석 / 이광규 / 을유문화사 / 4판 1쇄 2002년 1월 30일 / 9,000원 § 오래된 미래 - 라다크로부터 배운다 /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 달라이 라마 / 김종철·김태언 / 녹색평론사 / 개정증보판 3쇄 2001년 12월 1일 / 8,000원 § 욕망의 사물 - 디자인의 사회사 / 에이드리언 포티 / 허보윤 / 일빛 / 초판 2쇄 2008년 4월 4일 / 15,000원

탐험가 : 각시탈 1·2·3 / 허영만 / 유어마인드 / 복각판 초판 1쇄 2015년 6월 10일 / NO.000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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