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동 35번지 이야기
여자는 제법 많은 애완 물건을 가지고 있었다. 여자가 자신을 위해 마련한 물건들로, 물건마다 제각기 이름이 있었으며 ━이름은 종종 뒤섞이곤 했지만 여자도, 물건들도 그 사실을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35번지 구석구석에 놓여 있다. 분명 여자가 애정을 쏟아붓던 애완 물건이었으나 어느 날 갑자기 자취를 감춘 것도 있는데, 그런 경우는 둘 중 하나였다. 35번지를 장악하고 있는 폭군 고양이들의 놀잇감으로 전락하여 이리저리 휘둘리다 그만 가구 아래로 굴러 들어가 버리는 바람에 여자가 이사 가기만을 바라고 있거나, 다람쥐가 감춰 놓은 도토리에서 싹 나듯 어느 서랍장 깊숙이 넣어둔 상자 속의 상자 안에서 싹 틔울 날을 기다리고 있거나. 아무래도 손에 일이 잡히지 않고 청소할 곳도 없는 데다 조금 나른하고 격렬하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때면 여자는 애완 물건들을 하나씩 꺼내 들여다보고 쓸어보고 말을 걸었다. 여자는 애완 물건들과 시간을 보낼 때면 음송증이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되짚어 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여자가 애완 물건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리는 모습은 누가 봐도 꼭 정신이 집을 나가버리는 바람에 혼자 떠들게 된 것처럼 보일 게 뻔했기 때문이다. 있지도 않은 시선이 신경 쓰일 때면 여자는 애완 물건을 향해 “설마, 너도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지? 그러지 마. 난 괜찮아. 그리고 어차피 여긴 우리들 뿐이잖아.”라고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어쨌든 여자는 애완 물건들을 애지중지했고, 누구든 허락 없이 손대는 것을 싫어했고, 그래서 손님이 찾아오기라도 하면 자신의 애완 물건을 탐낼까 한껏 예민해지기도 했다. 여자는 무엇이든 사용하지 않는 물건이면 버리고 보는 게 취미였지만 ━그나저나 사용하지 않아서, 앞으로도 쓸 일이 없겠지 싶어 냉큼 버린 물건은 왜 버리고 며칠 뒤에야 꼭 필요해지는 것인지━ ‘쓸모없고 아름다운’ 애완 물건만큼은 어떻게든 끌어안고 살았다. 그런 연유로 35번지에는 어디에나 애완 물건이 있었다. 크기도 모양도 제각각이어서 부득불 곳곳에 흩어져 지내고 있었지만, 그중에 몇은 의도치 않게 만들어진 공간이나마 버젓이 차지하고 있다. 35번지에 건물을 올릴 때 어쩔 수 없이, 의도치 않게 만들어진 공간이 있었는데, 사람을 입주시키기에는 너무 좁아서 마침 잘 되었다고 애완 물건을 입주시킨 것이다.
S1 구역에는 고양이 두 마리가 산다. 프랑스에서 데려온 고양이로, 고양이들은 어느 만화가게의 진열대 위에서 제각기 상자 속에 들어 있었다. 어느 상자에 어떤 고양이가 들어 있을지 알 수 없었고, 어떤 고양이를 만나게 될지는 그저 운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여자는 고양이들이 답답해하는 것이 느껴졌음에도 굳이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야 상자를 열어주었다. 고양이들은 바스락바스락, 제 몸을 휘감고 있던 비닐을 걸어나와 마른기침을 했다. 주위를 슥, 둘러보더니 ‘miaou’하고 짧게 소리를 냈는데 여자는 어느 나라나 고양이들은 비슷한 소리를 내는구나 싶어 공연히 반가웠다. 대부분의 고양이들이 그렇듯 프랑스에서 온 고양이들도 이내 공간을 점령하고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던 듯 지내고 있다.
S2 구역에는 오리와 나무가 산다. 오리는 오리 부리처럼 노란 옷을 입고 있어서 오리라고 부른다. 사실 제대로 계보를 따지자면 “원숭이” 쪽이겠지만, 사람에게 이름 붙여지는 원숭이들이 어디 원숭이를 떠올리게 하는 이름을 갖고 있던가. 아무튼 오리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넘나” 귀엽고 예뻐서 귀여운 발음을 가진 이름을 붙여주고 싶었고, 마침 오리 부리처럼 노란 옷을 입고 있어서 오리라고 부른다. 오리를 부를 때는 늘 ‘우리 오리’라고 부르는 것도 “넘나” 귀여운 오리의 귀여움이 조금 더 커지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나무는 어느 겨울, 강원도 어디쯤에서 만났다. 나무를 데리고 있던 사람은 무대 만드는 사람이었다. 어느 뒤풀이 자리에서 무대 만드는 사람과 술을 마시게 되었고, 뚝닥 뚝닥 만들어내는 그 사람의 공구상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고, 그 사람은 자신의 차 트렁크까지 열어보였다. 그 사람의 트렁크는 지금도 선연히 기억날 만큼 인상적이었다. 어두운 중에도 공구상자들이 열을 맞춰 “차곡차곡” 쌓여 있었고, 공구상자에는 공구들이 “가지런히” 들어 있었다. 나무도 그중 하나였다. 여자는 나무에게 한눈에 반했는데, 반하는데 이유랄 것은 없었다. 나무도, 오리가 그랬듯 “넘나” 귀엽고 예뻤다. 무대 만드는 사람은 선뜻 나무를 여자에게 내주었고, 여자는 나무를 꼭 끌어안고 연신 허리를 굽혀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그 사람과 함께였다면 나무는… 좀 더 멋진 삶을 살았을 텐데, 그런 나무를 데려다 앉힌 것이 못내 미안했지만 여자에게도 나무가 필요했다. 나무는 여자에게 단순히 매력적인 것 이상이었다.
S3 구역에는 고양이 한 마리와 로봇 두 개━잠시 고민했다. 로봇 두 분…은 확실히 아니고, 두 사람…도 아니고, 두 개…라고 하기에는 그간의 정이 무색하고… 두 마리…는 좀 아닌 것 같고. 어쨌든 애완‘사물’이니 그냥 두 개라고 하기로━가 산다. 아톰 여동생 아롱도 이 곳에서 지내고 있었는데 35번지의 폭군 고양이에게 몇 번 습격을 당하는 바람에 보호 차원에서 격리 조치되는 바람에 셋만 남았다. 고양이는 최근 모 밴드의 뮤직비디오━여자가 자꾸 “영감”을 찾아대며 미적대는 바람에 뮤직비디오는 아직 론칭되지 않았으나 결국 완성될 것이다━에 출연했고, 로봇들은 조종사가 휴직인 관계로 그저 서있기만 한지 오래되었다. 여자에게는 조종사를 구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따금씩 로봇의 어깨 위에 쌓인 먼지를 털어주는 것으로 은근한 애정을 표하기는 했지만, 로봇들이 마음껏 활개 치도록 조종해줄 인간을 구하려들지는 않았다. 조종사들에게 월급 줄 일이 까마득해서가 아니라 폭군 고양이들이 어지르는 것만으로도 벅찼기 때문이었다.
S4 구역에는 앨리스와 앨리스* 그리고 앨리스*와 곰*이 산다.
앨리스와 앨리스는 영희처럼 꽤 여러 동네에서 각양각색의 부모에게서 태어나 이러저러한 사정 속에서 그럭저럭 잘 사는, 수많은 앨리스 중에 하나다. 앨리스도. 아무리 다 같은 앨리스라고 해도 서울 사는 영희와 부산 사는 영희와 울릉도에 사는 영희가 서로 다른 생김을 가지고 각자 다른 상황 속에서 살아가듯 앨리스와 앨리스, 그리고 앨리스도 마찬가지였다. 한 반에 이영희 김영희 신영희가 있는 게 이상하지 않은 것처럼 S4 구역에서 앨리스와 앨리스, 앨리스가 같이 지내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여자는 가끔 도로시와 앨리스를 헷갈려서 앨리스와 앨리스 혹은 앨리스더러 도로시라고 부를 때가 있었다. 다행히 앨리스와 앨리스, 앨리스는 앨리스가 아닌 이름으로 불리는 것을 재미있어했다. 도로시라고 불린대도 앨리스와 앨리스, 앨리스는 다 앨리스였으니까.
곰은 작은 새와 헤어졌다. 작고 사랑스러운 새를, 가슴을 가득 채우던 그 그리움을 놓아버리고, 곰은 하염없이 숲을 걸었다. 곰의 가슴속에 가득하던 마음이 모두 흘러나가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고, 텅 비어버린 가슴을 들여다보던 곰은 차마 놓지 못하고 있던 새의 그림자를 살며시 놓아주었다. 잠시 어리둥절하던 새의 작은 그림자가 텅 비어버린 곰의 가슴속을 사뿐사뿐 날아다니기 시작하자 어디선가 똑, 똑…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곰이 잃어버린 그리움은, 곰의 가슴이 다시 마음으로 가득 차오를 때까지 날아다닐 거였다.
S4의 애완 물건
앨리스와 앨리스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 거울 나라의 앨리스 / 루이스 캐럴 / 마틴 가드너 / 존 테니얼 / 최인자 / 북폴리오 / 초판 15쇄 2010년 2월 10일 / 29,000원
앨리스 : Alice's Adventures in Wonderland / A Pop-up Adaptation of Lewis Carroll's Original Tale by Robert Sabuda / LITTLE SIMON / US $28.98
곰 : 곰과 작은 새 / 유모토 가즈미 / 사카이 고마코 / 고향옥 / 웅진주니어 / 초판 4쇄 2011년 7월 5일 / 8,5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