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동 35번지 이야기
35번지에서 가장 인적이 드문 곳이다. 그러나 여자가 가장 자주 찾는 곳이기도 하다. 인적이 드물어 어둡고 어두우니 더 스산하고 스산해서 등골이 서늘해질 지경이지만 자의 반 타의 반 가장 자주 찾을 수밖에 없는 곳이다. 여자가 하루를 잇는데 필요한 실과 바늘이 이 곳에 있기 때문이다.
여자가 처음으로 실과 바늘을 잡은 건 12년 전이다. 처음 잡은 바늘에 실을 꿰어 처음으로 한 일은 셔츠 왼쪽에 이름표를 다는 일이었다. 이름표는 여자의 가슴을 단단하게 조이는 압박붕대였고, 긴 머리칼을 돌돌 말아 올려 단단히 묶는 머리끈이었고, 말꼬리를 끊어내는 날 선 눈빛이었다. 여자는 여자라는 것을 가능한 자주 드러내야 했고, 여자라는 사실을 누구도 알게 해선 안되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고, 그렇게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 믿음을 준 것은 여자가 아니었으나 여자는 그 믿음을 제 왼쪽 가슴에 심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살아남아야만 했을까. 살아남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던 여자였기 때문에 맹목적으로 살아남아야만 한다고 생각을 것이다. 여자가 자신의 ‘눈’을 갖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다만 바라볼 뿐인 그 눈이 제대로 보게 하기 위해 여자는 또 살아남아야만 했다.
쓰다만 실패, 바늘쌈이 어지럽게 쌓여 있는 곳이다. 여자가 필요할 때마다 산 실패들은 제 몸에 감긴 실을 다 풀어내지 못한 채 쌓이기 일쑤였고, 귀에 실 한 오라기씩 걸고 바늘꽂이 위에 서 있거나 바늘쌈 안에 널브러진 바늘이 부지기수였다. 여자는 이따금씩 풀린 실을 다시 감거나 귀에 꽂힌 짧은 실오라기를 빼 손끝으로 공글리다 버리기는 했지만 어지럽게 널린 실패와 바늘꽂이, 바늘쌈을 정리하지는 않았다. 정리하고 싶지 않아. 주변이 어지러우면 집중하지 못하는 여자가, 물건을 정리하고 청소를 한 후에야 쌓인 일을 정리할 수 있는 여자가, 유독 이곳은 정리하려 들지 않았다. 자꾸 시간에게 미뤘다.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에 기억하고 싶기도 했지만 그래 봐야 좋을 게 없다는 듯이. 그래서 자꾸 새 실패를 사들이는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곧 새 물건을 들일 테니까, 그러면 다시 정리를 해야 하니까, 그때 해도 괜찮을 거라고 미루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150GB, 500GB, 1TB 하드디스크 각 1개씩 / 700MB 공 CD 십여 장 / 종이 CD 케이스 한 상자 / 빈 노트 한 권 / 지난 달력 두 권 / 그림일기장 / A4 용지 250매 한 묶음 / 사전 한 권 / 출력된 연극 대본 한 편 / 파일 케이스 3개 / 출력된 자료 수십 장 / 입주하지 못한 예닐곱 명의 사람들 / 그리고 열거할 수 없는 ━차마 열거하지 못하는 것은 귀찮기도 귀찮거니와 실 따라서 기억 위로 올라올 그 모든 것들이 번거롭기 때문이다━ 자료들, 물건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