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동 35번지 이야기
별채는 35번지 지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따로 지어야 했던 건물이다. 어쩔 수 없이 지정된 변방에 단출하게 지어진 2층짜리 건물 첫 번째 객실에는 사람 대신 종이만 가득하다. 낱장으로 묶음으로 대강 섞여 쌓인 종이뭉치 사이에 바랜 사진첩 몇 권과 노트 서너 권이 끼어 있다. 제 역할이 무엇이든 개의치 않는 종이는 습기에 민감했고, 별채의 101호는 볕 들일이 없는 곳이었기 때문에 습지로 변해가고 있다.
‘구슬’들이 사는 곳이기도 하다. 여자는 꽤 오래 구슬을 모았다. 코로, 입으로, 눈으로, 손으로, 귀로… 사용 가능한 모든 ‘몸’을 써서 구슬을 모았다. 마구잡이로 수집된 구슬은 여자의 혈관을 타고 돌며 제 몸을 씻었다. 여자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두어 번쯤, 돌며 씻고 나서야 구슬들은 제 마음대로 굴러다닐 수 있었다. 구슬들은 여기저기 굴러다니느라, 때때로 저희끼리 부딪느라 흠집이 나기도 했는데 여자는 개의치 않았다. 이런 때는 저 구슬, 저런 때는 이 구슬을 번갈아 꺼내어 손 안에서 궁굴렸다. 한참을 이리저리 궁글리다 구슬을 꿰어 이런저런 것들을 만들기도 했는데 완성하고 나면 이내 구슬 엮은 끈을 끊어 맨바닥에 투두둑, 구슬을 떨구었다. 흠집난 구슬을 하나하나 주워 또 한참을 손 안에서 궁굴리다 허름한 가죽 주머니에 한데 담아놓았다. 공들여 모은 것이었으나 좀처럼 꿰는 일이 없어 주머니에 든 것이 콩알인지 구슬인지 여자조차 헷갈릴 때가 있었다. 얼마 전부터 여자는 구슬이 든 가죽 주머니를 자주 들여다보았다. 주머니 바닥까지 손을 집어넣고 천천히 휘휘 저으면서 손바닥과 손가락과 팔뚝에 감겨드는 구슬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박제를 모아둔 곳이다. 대부분 여자의 주변 사람들이 박제해 보관하고 있던 것을 여자가 옮겨다 두었다. 여자가 박제들에 별 감흥이 없는 것은 여자 아닌 다른 사람이 여자의 일부를 떼어다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보관하고 있는 것은 기록이기 때문이다. 어느 때, 어디에 있었다는 기록에 불과하지만 기록은 중요한 것이니까. 한때 박제술에 대단히 흥미를 느끼고 전문가에게 배우기도 했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박제할 수 없는 것을 박제하고 있었고, 박제하고 싶었고, 박제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박제를 아주 그만둔 것은 아니지만 신중해졌다고 해야 할지, 무덤덤해진 것인지… 그보다는 과한 의미를 담지 않게 되었다고 하는 편이 더 가까울 것 같다.
정과 망치를 보관하는 곳이다. 크고 작은 약속을 새길 때마다 쓰는 정과 망치를 보관하고 있다. 주로 자신의 몸에 새기는 것을 좋아하지만 ━대단히 매우 중요한 일만 대단히 오래도록 깊이 생각한 후에야 새긴다. 약속 또한 몸과 함께 늙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약속은 나무에 새겨졌다. 몸 보다야 나무가 만만하기야 하겠지만 지켜져야만 하는 약속을 나무에 새기는 것이 세상 사람들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유효기간이 끝나버린 약속과 아직 유효한 약속과 덧없는 약속 같은 것들이 새겨진 나무 뭉치를 정과 망치 뒤에 늘어놓았다.
아주 가끔씩 정말 濕地가 되지 않도록 손에 잡히는 대로 꺼내 후루룩 바깥공기로 쌓인 먼지를 털어줄 뿐, 꼼꼼히 들여다보거나 오래 머물지 않았다. 마주보기에 죄스러운 마음이, 부끄러운 마음이 가시기 전까지는 앞으로도 계속 그럴 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