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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 Aug 25. 2017

별채 : 102호 : 多幸

백수동 35번지 이야기

百修洞 三十五番地 斷面圖 · 백수동 35번지 단면도



다른 방에 비해 별채의 101호와 102호만 층고가 높고 면적도 넓고 네 벽면에 페인트를 칠해 놓았다. 이 방만 시공 업체가 달랐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래저래 몸집이 크거나 생각이 크거나 행동반경이 넓은 이에게 적합한 방이다. 


207호를 화랑처럼 꾸며두기는 했지만 여자는 늘 그리는 사람을 그렸기 때문에 그림 그리는 사람을 곁에 두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하지만 그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좁고 어둡더라도 그림 도구 늘어놓을 최소한의 공간이 필요했고, 그런 공간을 만들자면 돈이 필요했기 때문에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내내 생각만 하다가 ━충동적으로 들어갔던 타로 점집의 타로술사는 생각만 하지 말고 행동하라고 했었는데, 생각‘만’ 하는 것은 여자의 오랜 버릇이다. 생각을 생각하려고 생각하기도 할 정도니 생각에 집착한다고 봐도 되겠다━ 어느 날 문득 귀 없는 사람*을 들였다. 귀가 없으면 잘 들리지 않을 것이고, 잘 들리지 않으면 목소리가 클 것이고, 어쩔 수 없이 좀 시끄러울 것 같았지만 그런 소음이 그림 그리는 사람을 그리는 여자의 마음을 돌려세울 수는 없었다. 다행히 귀 없는 사람은 소리가 없는 것처럼 조용했다. 그저 붓이 움직이는 소리, 펜이 움직이는 소리… 그림 그리는 사람 주위에 늘 있는 그림 도구처럼 두서없이 늘어선 자잘한 소리들이 전부였다. 귀 없는 사람은 여자가 그림 그리는 사람에 대해  가지고 있던 모든 환상을 완벽하게 보여주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어떤 그림을 그리든 여자는 개의치 않았다는 말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귀 없는 사람이 그린 그림을 두고 “그 사람이 그린 기린 그림은 긴 기린 그림이고 저 사람이 그린 기린 그림은 안 긴 기린 그림이라서 그 사람이 그린 기린 그림이 더 좋다”고 찧고 까불어도, 귀 없는 사람이 긴 기린 그림을 그리건 안 긴 기린 그림을 그리건 다 좋았다. 사람들이 하도 찧고 까부는 바람에 뭘 어째도 좋은 게 있으면 안 될 것 같았지만 그래서 더 뭘 어째도 좋은 것을 갖고 싶었다. 되도록이면 많이.

그래서 그림 그리는 사람을 한 명 더 들였다. 비싼 재료 쓰는 사람*은 비싼 재료만 골라 쓰면서도 별채 102호가 좁다고 불평하지 않았다. 여자로서는 참 다행이었다. 백수동 35번지 별채에서 비싼 재료 쓰는 사람은 여자를 주로 그렸다. 자연스럽게 여자들이 밑그림이 되기 위해 비싼 재료 쓰는 사람을 찾아왔다. 그러나 돌아간 여자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래도 비싼 재료 쓰는 사람은 그림 도구 아닌 것을 사용하고 있다는 의심이 들었다. 마법 같은 것을 써서 여자들이 스스로 화폭 속에 걸어 들어가도록 한 것은 아닌지, 여자 생각에는 꽤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여자는 비싼 재료 쓰는 사람의 그림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는데 과연, 그 사람의 방으로 들어갈 때와 같은 모습을 한 여자들은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결정적인 증거가 없었다. 정말 마법이라도 부리는 것인지, 아니면 꾸미기 나름이라던 그 말이 진짜인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비싼 재료 쓰는 사람은 비싼 재료 외에 없는 것 투성이었기 때문에 그 사람을 그대로 두어도 좋을지 가늠할 수 있는 것도 없었고, 자연스럽게 여자의 고민도 끝날 수 없었기 때문에 비싼 재료 쓰는 사람은 여태 102호를 작업실로 쓰고 있다.


어쩌다 마주친 그림 업자들*은 어쩌다 마주치기는 했는데 어쩌다 마주쳤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업자들이 내보이는 그림은 모두 여자가 좋아할 만한 것들이 아니었는데도 ‘업자’를 알고 있다는 묘한 긴장감과 뿌듯함 때문에 어쩌다 마주친 그림 업자들을 집에 들였다. 


여자는 무당을 좋아한다. 정확히는 주로 책에서 ‘가슴 아픈 사연을 품고 바꿀 수 없는 운명을 담담히 받아들여 사람들의 상처를 다독이는 아름다운 여자’로 그려지는, “판에 박힌” 무당의 모습을 좋아한다. 그러나 책 바깥의 “진짜” 무당을 더 좋아한다. 정확히는 경이로운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 존재 너머에 숨어 있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야기들, 이야기 속 주인공들, 경이로워서 천대받은 사람들. 그런 존재들의 흔적을 모아 놓은 곳에서 무구巫具* 정리하는 일을 맡았다. 온갖 念이 담긴 무구를 일일이 정리하고 다듬는 동안 여자는 빌어야 할 것도 빌고 싶은 것도 없으면서 빌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생각을 빌어다 빌고 그렇게 빌고 또 빌었다. 그렇게 생의 여러 날 중에 몇 날 며칠을 빌어다 썼다. 그리고 빌어다 쓰는 동안 여자는 보시布施를 생각했다.  빌어다 쓰고 있었으므로, 베푸는 것이 아니라 갚아나가는 것이었다. 무엇으로 갚을 수 있을까. 갚을 수나 있을까. 머리칼로 삼은 꽃신을 몇 켤레나 만들어야 마침내, 결국, 파이널리finally…. 


백수동으로 살림을 차려 나오면서 여자가 새로 산 그릇은 하나도 없었다. 어미가 챙겨준 그릇만으로도 작은 찬장이 그득하게 찼고, 그릇을 장만해야 할 만큼 담을 음식이 많지 않았고, 곱게 차려내 대접할 사람도 없었다. 그릇은 무엇을 담게 되든 잘 담고 있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는데, 외국 그릇*을 보고는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말을 떠올렸다. 예로부터 우리 선조들은 닳고 닳은 말들을 숱하게 남겨 주었는데, 하도 닳고 닳은 말들이라 그런지 어디든 들어맞지 않는 곳이 없다. 너무나 흔해서 도통 눈에 띄지 않는 만능열쇠 같달까. 어쨌든 그렇다고 예쁜 그릇을 사들였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백수동에서는 곱게 차려내 대접할 일이 없었고, 무엇보다 여자가 욕심 내는 분야의 물건이 아니었고, 지금의 여자에게는 그저 곱게 ‘담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여자가 어렸을 때, 집에 각종 벽돌이 넘쳐나던 때가 있었다. 시멘트 벽돌, 붉은 벽돌, 가운데에 구멍이 뚫린 벽돌… 그 벽돌은 침대가 되고, 책장이 되고, 어항이 되었다. 집 빼고 집에 들어가는 거의 대부분의 가구를 만들 기세였던 여자의 엄마 덕분에 여자도 벽돌 수집에 동원되었다. 근처 공사장에 따라가 양 손에 하나씩 들어 나르거나, 벽돌 위에 올릴 합판을 함께 들거나… 어쩐지 그 시절 그 동네에는 집 지어 올리는 집이 많았고 ━그렇다고 진짜로 집이 저 혼자 벽돌 쌓고 콘크리트 붓고 해가며 저를 지어 올렸다는 것은 아니다━ 한두 개쯤 집어 가도 모를 만큼 나뒹구는 벽돌이 많았던 덕분에 여자는 자신의 침대━벽돌로 기둥을 세운 침대 이외에도 유리병으로 된 음료를 담아 나르는 플라스틱 박스를 깐 침대를 쓰기도 했다━를 가질 수 있었다. 그때 그 벽돌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외국 벽돌*을 보고 그때 생각이 났다. 각양각색의 외국 벽돌에 비하면 그 시절의 벽돌은 허름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지만 지나고 보니 아름다운 것이었고, 그런 기억을 간직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그리고 몇 개의 향, 몇 번의 ━여자의 기준에 부합하는━ 여행에 대한 증거가 있다. 숫자와 알파벳이 제 나름대로의 규칙을 가지고 나열된 그 증거들은 모두 종이로 되어 있어서 이제와 다시 열어 보면 대부분의 글자가 흐릿하게 번져 해독할 수 없지만 ━또렷하게 남아 있어도 여자가 알 수 있는 것은 ‘흰 것은 종이, 검은 것은 글씨’라는 것뿐이다━ 그때 그곳에서 가져온 증거이니 버릴 수 없다. 어떤 증거는 사진보다 더 또렷하게 그때 그곳을 환기시키고, 그때 그곳을 손바닥에 올려 구슬 굴리듯 굴리다 보면 그때 그곳은 그때 그곳보다 조금 더 예뻐 보인다. 꺼내 볼 때마다 조금씩 예뻐지는 그때 그곳이 있다는 것 또한 다행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이 있어서 다행이다. 幸이 많아지면 行이 될 수 있다. 적어도 여자에게는 그랬다. 여자는 幸을 모아다 오늘과 내일을 이어 붙일 실을 자았다. 티끌 모아 티끌, 이었으나 티끌 아닌 것이 없으니 티끌이어도 티끌이라도 있어서 또,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별채 102호 사람들

귀 없는 사람 : Vincent van Gogh: A Self-Portrait in Art and Letters / 빈센트 반 고흐 / H. 안나 수 / 이창실 / 생각의 나무 / 초판 1쇄 2007년 11월 30일 / 39,000원
비싼 재료 쓰는 사람 : GUSTAV KLIMT: Women / Angelica Bäumer / RIZZOLI NEWYORK / Paperback edition 1991 / Printed in Italy / $31.50
어쩌다 마주친 그림 업자들 : MODERN PAINTERS / OCTOBER 2013 / $9.95
무구巫具 : 샤머니즘박물관 소장유물 / 샤머니즘박물관 / 양종승 / 2014년 1월 31일 / 30,000원
외국 그릇 : TAPAS : SPANISH DESIGN FOR FOOD / 줄리 카펠라 Juli Capella / 페란 아드리아 · 파우 아레노스 / 한국국제교류재단 / 30,000원 
외국 벽돌 : ONE THOUSAND BUILDINGS OF PARIS / Jorg Brockmann · James Driscoll / Kathy Borrus / 2003 / Black Dog & Leventhal Publishers / $3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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