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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 Sep 10. 2017

별채 : 202호 : 外郭

백수동 35번지 이야기

百修洞 三十五番地 斷面圖 · 백수동 35번지 단면도



별채 2층은 백수동 35번지 안에서도 격리되어 있다는 분위기가 강하다. 진짜로 격리된 사람들이 있기는 했지만 어떤 사람들은 가장 좋은 방을 고르고 고르다 별채 2층으로 오게 됐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종 ‘아끼다 똥 된다더니 그 짝이 났다’며 투덜거렸다. 위치가 좀 외졌다 뿐 다른 조건은 본채와 같은데 그리 투덜거리는 것을 보면 ‘외진 곳’이라는 게 불만인가 보았다. 이 좁은 동네에서도 ‘중심’에 대한 열망이 있었다.


러시아 사람*을 좋아했던 것은 어딘지 모르게 그늘져 있었기 때문이다. 무더운 여름날 바람도 아이들도 지나가는 개미 한 마리도 없는 초등학교 운동장━‘운동장’이라는 것을 증명하긴 해야겠는데 만사 귀찮고 부질없어 아무 데나 주저앉아 그저 시간이 흘러가기만을 바라는 것처럼 보이는 철봉과 정글짐, 그네, 시소가 덩그러니 앉아있는━에 생뚱맞게 선 늙은 나무의 그늘 같았다. 딱히 시원하지 않지만 어쩐지 시원해질 것만 같아서 자꾸 중심 쪽으로 엉덩이를 들이밀게 되는 그런 그늘. 어둠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만큼만 짙은 그늘이었다. 더 깊은 어둠으로 가든, 더 높은 빛으로 가든 얼마든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고 믿게 만드는 농도였다. 그런 러시아 사람에게 단점이 있다면 이름이 많다는 것. 그냥 기분 내키는 대로, 내킬 때마다 바꿔 부르는 게 분명해 보이는 그 이름들을 장단 맞춰 불러주기는 했지만 못내 아쉬웠다. 그래서 여자는 러시아 사람을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로 기억한다. 수시로 바뀌는 이름은 러시아 사람의 눈매, 코 모양, 머리카락 빛깔 같은 구체적인 형태를 지워버리고 온갖 냄새와 소리가 뒤섞인 분위기를 남겨두었다. 설명하기 어렵지만 설명하지 않아도 좋은 분위기는 러시아 사람을 좋은 사람으로 기억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러시아 사람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늘 좋은 사람이다.


자신의 잘못을 태양 탓으로 돌리던 남자*는 코트 깃을 세운 남자━204호에 산다━를 소개해 주었다. 자신의 잘못을 태양 탓으로 돌렸기 때문에, 남자는 숱한 구설에 시달려야 했다. 그의 명확한 말과 행동이 올가미가 되어 사람들의 팔목, 발목을 붙들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색’을 만드는 것은 빛이었으므로 색을 볼 때마다 어딘지 모르게 빚진 기분이 들었지만 색깔이라고 발음할 때보다 빛깔*이라고 발음할 때가 더 좋았다. 분명했지만 분명하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억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이 무슨 색을 띠든 그건 그 기억이 가진 분명한 색깔이었지만 분명하지 않은 빛깔이기도 했다. 같은 기억에 매번 다른 빛깔을 칠하기를 좋아했던 여자는 마침내, 그 기억이 그 기억이 맞는지 헷갈리게 되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처음부터 색이란 비어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무엇으로 칠해지든 상관없었다. 다만 그 빈 빛깔들의 무게가 무거울 뿐.


눈동자들*은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건져 올려 글자 속에 담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골라내다 보니 오류가 많았지만, 그들이 건져 올린 오류는 또 다른 오류로 정정되곤 했다. 눈동자들은 어느 날 여자에게 몇 점의 그림을 가져다주었는데, 그들이 가져온 액자 속에는 그림 보다도 심리테스트 풀이 같은 글자만 가득했다. 그림이 갖고 있었을 색깔은 뿌옇게 흐려지고, 흐려지다 못해 하얗게 질린 캔버스에 빼곡하게 새겨 넣은 까만 글자에 질려, 여자는 액자를 손에 든 눈동자들이 걸어 들어온 그대로 별채 202호로 들어가도록 했다. 문이 닫히자, 여자도 눈동자들도 조그맣게 읊조렸다.

“좋아, 자연스러웠어.”



별채 202호 사람들

러시아 사람 :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상·중·하 § 백치 상하 § 가난한 사람들 § 분신 / 표도르 도스또예프스키 / 열린책들 / 열린책들세계문학전집

자신의 잘못을 태양 탓으로 돌리던 남자 : 이방인 / 알베르 카뮈 / 이정서 / 새움 / 초판 3쇄 발행 2014년 4월 11일 / 13,800원
빛깔 : 우리 기억 속의 색 / 미셀 파스투로 / 최정수 / 안그라픽스 / 초판 2011년 8월 1일 / 15,000원
눈동자들 : 철학자가 사랑한 그림 : 기묘한 미술로 삐딱한 철학하기 / 김범수·김성무·류종렬·서영화·이지영·이현재·전호근·조광제·조은평·현남숙·황희경 / 알렙 / 1판 1쇄 2013년 3월 1일 / 1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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