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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 Sep 25. 2017

별채 : 203호 : 始終

백수동 35번지 이야기

百修洞 三十五番地 斷面圖 · 백수동 35번지 단면도



별채 203호에 사는 사람들을 소개하려니 입술이 꿀 발라 놓은 것처럼 들러붙어 떼기가 쉽지 않다. 마지막으로 소개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은 아니다. 마지막이 뭐 대수라고. 마지막이라는 것은 신기루 같은 것이어서, 손에 잡힐 듯하다가도 한걸음 가까워지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려 계속 무언가를 하게 만드는 것이니 대수로울 것이 없다. 굳이 ‘또 다른’, ‘새로운’ 따위의 수식어를 붙여 전혀 다른 것을 ‘시작’하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것도 마뜩잖고. 어쨌든 쉽게 첫마디를 떼지 못하는 건 여자의 ‘호기심을 가장한 허영심’이 투영된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기 때문에, 소개하려니 막상 부끄러워지는 것이다. 그만한 허영심 없는 사람 어디 있겠나, 그래도 이만한 허영심 채우자고 들인 돈이 적어도 집 한 채 값은 되지 않으니 ━집값이 엄청나게 비싸서 참 다행이기도 하고, 덕질 수양이 모자랐다 싶어 부끄럽기도 하고━ 괜찮다, 다독이며 소개할까 한다.


어려서부터 이웃사람*과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여태 요원하기만 하다. 게다가 이제는 이웃사람에 대한 호기심도 관심도 싸늘하리만큼 식어버렸다. 이해하고 싶다는 열망은 좋은 사람에게만 지속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혜원*을 처음 알게 된 것은 학생 1이던 때였다. 그때 혜원을 소개해 준 사람은 그 앞을 ‘쓱’ 지나가면서 웅얼웅얼 그의 이름을 소개해 주었다. 자꾸 돌아보려는 학생 1의 등을 떠밀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시간이 흘러 다시 만난 혜원은 알 수 없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시간여행 기계를 타고 과거로 가면 이런 기분일까 싶게, 그 시대를 살지 않으면 보고 들을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여자는 혜원의 시대를 읽을 수 있는 ‘문자’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혜원은 문자 아닌 그림으로 ━따지고 보면 그의 그림은 “문자”와 다름없었다━ 자신의 시대를 들려주었다. 혜원이 아니었다면 혜원의 ‘때’는 영영 ‘바늘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시대로 박제될 뻔했을 것이다. 물론 혜원이 아니더라도 그때를 살았던 사람은 많고 많았지만, 혜원처럼 알 수 없었던 이야기를 전하려 갖은 수를 쓴 사람도 없지 않았지만, 혜원만큼 탁월할 수 있었을까. 시대와 시대를 가로막는 가장 큰 “벽”을 건너뛸 수 있는 방법, 그것에 거침없이 투신한 사람은 흔치 않다.


신은 무당만큼이나 좋아하는 것 중 하나였다. ‘그땐 진짜로 다 그랬다’고 하더라도 이상할 것 없는 ‘가짜’는 생각 이상으로 매력적이었고, ‘신’이 들어가는 것이라면 가리지 않고 다 보았으나… 중국에서 온 신*만큼은 좀처럼 정이 붙지 않았다. 별다른 감정은 없고… 취미가 일이 되면 하기 싫어지는 것과 같은 것일 뿐이었다. 그래도 살 맞대고 살다 보면 정이 붙겠지 싶어 내치지 않고 있는데… 뭐, 살 맞댈 일이 없어 정이 생길 일은 없을 것 같지만 그렇대도 최후의 보루는 있다. 여자의 허영.


카드모스와 하르모니아의 결혼*식에는 가지 않았다. 일면식도 없었으므로 축하금도 보내지 않았다.


몇 가지 절차━어떤 사람의 친구의 동생, 그 동생의 사촌, 그 사촌의 애인, 그 애인의 아버지… 같은 절차였다━를 거쳐 오스트리아에서 온 곱슬머리*를 마주했을 때, 여자의 동공 속에 웅크리고 있던 정신은 깜짝 놀라 엎어지면서 동공 밖으로 쏟아져 나왔고 그 순간 여자는 환청을 들었다. 전화 벨소리였다. 여자는 텅 빈 동공에 정신을 주워 담을 겨를도 없이 전화를 받았다.

“여… 보세요?”

“네, 거기 심장 있나요?”

“네, 여기 심장이 있긴 했어요.”

“지금은 없다는 건가요?”

“네, ‘쿵’ 소리를 내면서 떨어졌는데… 어떻게 됐는지 안 보이네요.”

“저런, 어쩌죠?”

“제 심장에게 무슨 볼 일이 있으셨나요?”

“네, 그게…….

“뭐죠? 그 볼 일이라는 건…….

“두들겨 패려고요.”

“네?”

.”

그랬다. 오스트리아에서 온 곱슬머리는 여자를 ‘심쿵’하게 한 것으로도 모자라 ‘심장 폭행’까지 계획하고 있었다. 그 계획을 알았대도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이미 오스트리아에서 온 곱슬머리의 계획대로, 마주한 그 순간 여자의 심장은 바닥에 쿵, 떨어진 채로 흠씬 두들겨 맞았으니까. 앞뒤 잴 것 없이 여자는 오스트리아에서 온 곱슬머리를 별채 203호에 들였고, 이따금씩 그 사람에게 맞아 찬 바람이 불 때마다 시큰거리는 심장을 들고 간다. 그러면 오스트리아에서 온 곱슬머리는 찬 바람에 파랗게 질린 심장에 빨간 물감을 칠해 주었다. 그러면 파랗던 심장은 멍든 것처럼 보랏빛으로 보였는데 그때마다 여자는 제 심장이 원래 무슨 색이었는지 고민해야 했다.


‘딱히 필요하지 않지만 갖고 싶은 물건 100가지’ 중에 하나이던 온도계와 습도계*를 큰 마음먹고, 호기롭게 마련했다. 온도계와 습도계가 없어도 사는데 불편함은 없었다. 자정 즈음 산책하기 좋은 온도라든가, 먼지 냄새가 맡아질 만큼 축축하다든가, 술 마시기 좋은 온도 혹은 손바닥을 쫙 편 채로 마주 비비기 딱 좋은 건조함… 굳이 ‘숫자’를 확인하지 않아도 온도와 습도를 알 수 있었고, 그만큼만 알고 있어도 살아가는 것은 물론 소통하는 데에도 불편함이 없었다. 간혹 숫자가 없다는 것을 문자가 없는 것만큼이나 답답해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런 사람들은 이미 가장 좋은 온도계와 습도계를 컬렉션으로 가지고 있었으니 이미 불편하려야 불편할 수없이 살아가고 있는 셈이었다. 아무튼, 여자가 없어도 그만인 것이나 다름없는 온도계와 습도계를 구입한 것은 의외로 허영보다 알고 싶다는 욕망이 더 컸기 때문이다. 여자가 애정하는 ‘추상적인’ 온도와 습도를 옳게 설명하려면 어쩔 수 없이 ‘숫자’가 필요했고, 숫자 속에 숨겨진 또 다른 의미에 관심이 생겼고, “술 마시기 좋은 온도”를 꽤나 다양한 숫자로 바꿔 설명할 수 있다는 것에 재미를 느꼈고… 그런 이유로 온도계와 습도계를 세트로 구비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정작 온도계와 습도계가 여자를 볼 일은 거의 없었다. 복습은 몰라도 예습에는 소질이 없는 체험형 인간인 여자였던지라, 필요에 닥치지 않으면 온도계와 습도계를 돌아다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세상의 걸음은 누구보다 빨라서 여자가 구입한 온도계와 습도계를 길들일 틈도 없이 디지털 온도계와 습도계가 쏟아졌다. 그것은 심지어 무료였고, 더 다양한 기능을 가지고 있었고 ━온도계, 습도계가 온도, 습도만 정확히 보여주면 되지 무슨 기능이 필요하냐고 투덜대면서도 여자는 늘 이런저런 기능이 첨부된 것을 더 좋아했으나 다행스럽게도 이 ‘맹목’은 “디지털”에만 국한돼 있다━ 자연스럽게 별채 203호 입구에 걸린 온도계와 습도계를 찾는 일은 더 줄어들고 말았다. 그래도 여자는 아주 가끔, 백수동을 산책하다가 203호 앞에 서서 온도계의 빨간 막대가 조금이라도 올라갈 때까지 알코올 구를 두 손가락으로 꼭, 꼬-옥 누르고 있거나 습도계 모발에 입김을 불어넣곤 했다. 한 가지 기능밖에 없는 데다 정밀한 숫자를 보여주지 못해도 별채 203호에 온도계와 습도계가 걸려있다는 게 여자는 참 좋았다.


장신구*는 어디선가 누군가로부터 추천을 받아 장만한 것들이다. 여자는 장신구를 착용하지 않아서 ━생에 기억할만한 일이 생길 때마다 귀에 뚫어 놓은 구멍마다 걸어 놓은 것 몇 개와 여자 대신 고생하는 손가락에 면피하려고 끼워둔 것 몇 개 그리고 ‘비상금’은 부적 같은 것들이니 제외하고, 여자가 장신구를 걸치는 일은 손에 꼽기도 어렵게 드물다━ 장신구들은 장사 속에 고이 모셔져 있다.


사람들은 언제인가부터 손가락이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을 더 자주, 많이 보았기 때문에 손톱 치장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렇게 다듬으니 예쁘더라, 저렇게 치장하니 보기 좋더라…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덕분에 치장한 손톱*에도 역사라 부를 만한 것이 생겼다. 세상의 거의 모든 손가락은 이 치장한 손톱에 빚을 지고 있다. 채무는 갚을 길이 없고, 언제까지나 손가락은 치장한 손톱에 의지하겠지만 치장한 손톱은 손가락이 되고 싶은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다. 하아… 이래서 삶은… 달걀인 것인가.



별채 203호 사람들

이웃사람 : 고등학교 일본어 1·2 / 금성출판사 § 40과로 된 진명 일본어 / 동덕여자대학교 교수 원영호 / 진명출판사 / 초판 21쇄 2005년 4월 25일 / 6,500원
혜원 : 조선 사람들, 혜원의 그림 밖으로 걸어 나오다 / 강명관 / 푸른역사 / 초판 1쇄 2001년 12월 12일 / 15,000원
중국에서 온 신 : 중국 신화의 이해 / 전인초·정재서·김선자·이인택 / 아카넷 / 1판 2쇄 2002년 2월 10일 / 12,000원
카드모스와 하르모니아의 결혼 : 로베르토 칼라소 / 이현경 / 동연 / 초판 1999년 8월 10일 / 15,000원
오스트리아에서 온 곱슬머리 : 에곤 실레, 벌거벗은 영혼 / 구로이 센지 / 김은주 / 다빈치 / 1판 1쇄 2003년 4월 30일 / 15,000원
온도계와 습도계 : 뜻도 모르고 자주 쓰는 우리말 사전 / 박숙희 / 책이있는마을 / 2판 5쇄 2005년 12월 26일 / 25,000원 § 유래를 알면 헷갈리지 않는 우리말 뉘앙스 사전 / 박영수 / 북로드 / 초판 2쇄 2007년 11월 10일 / 15,000원
장신구 : 악마의 눈물, 석유의 역사 / 귄터 바루디오 / 최은아·조우호·정항균 / 뿌리와 이파리 / 초판 1쇄 2004년 7월 28일 / 25,000원 § 데블 : 고대로부터 원시 기독교까지 악의 인격화 / 제프리 버튼 러셀 / 김영범 / 르네상스 / 초판 2쇄 2006년 4월 20일 / 20,000원 §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그러나 잘 알지 못했던 세상의 몇 가지 사실들 / 제시카 윌리엄스 / 이혜리 / 여름언덕 / 1판 2쇄 2006년 5월 10일 / 9,800원 § 이코놀로지아 : 그림 속 비밀을 읽는 책 / 체사레 리파 / 김은영 / 루비박스 / 1판 1쇄 2007년 8월 2일 / 15,900원
치장한 손톱 : 한 줄의 활자 / 알레시오 레오나르디·얀 미덴도르프 / 윤선일 / 안그라픽스 / 초판 2010년 8월 10일 / 1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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