百修洞 三十五番地 이야기 : 流浪船
여자는 늘 구원자를 기다렸다. 자신을 구해줄 사람은 자신뿐이라는 것을 알면서 (그렇기에 더더욱) 어디에도 없는 구원자를 원하고 바라고 또, 기다렸다. 오죽하면 자신의 몸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새긴 ‘글자’가 ‘save from myself’였을까. 그러니까 여자는 끝도 없는 기다림에 제 영혼을 팔아치운 셈이었다. 악마에게 팔았으면 잠시뿐이더라도 부와 명예를 얻었을 텐데, 하필 기다림에게 팔아버린 덕에 손에 쥐어지는 것이라곤 먼지라든가 한숨이라든가…. 아무짝에도 쓰일 곳 없으며 심지어 아름답지도 않은 것뿐이었다. 쥔 것도 없이 앙주먹을 쥐고선 기다림의 어디쯤을 헤매고 있을 때 메리*-뽀삐 친구 메리 아니고 영희 친구 메리, 그러니까 철수 친구이기도 하고 존의 친구이기도 한 사람-를 만났다. 메리는 자신의 “인생을 망치러 온 구원자”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메리의 인생을 망치러 온 구원자는 철필 끝에서 나온 잉크로 만들어졌는데, 메리를 포함해 인생을 망친 대부분의 사람들은 철필에 찍어 쓰는 잉크로 자신의 피를 쓰곤 했다. 그러니 인생을 망치러 왔다는 수식어는 차라리 얌전한 축에 속했다. 죽음으로 가려면 이 길로 가면 된다고 알려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하지만 메리는 그 모든 것을 알고도 멈출 수 없었다고 했다. “Ann이 아니라 ‘e’가 붙는 Anne”도 아닌 밋밋한 이름을 자신만의 것으로 온전히 지켜야 했기 때문이었다.
메리와 헤어진 후 여자는 메리를 포함해 ‘인생을 망쳐버린 숱한 사람들’에 대해 생각했다. 그들이 인생을 망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생각했다. 그들 모두 자신의 이름을 오롯이 지켜내기 위한 단 하나의 방법으로 제 피를 잉크 삼아 문장을 지었다는 것이 여자가 생각할 수 있는 이유의 전부였다. 그러니 그들의 인생을 망친 것이 다름 아닌 구원자였다는 모순만큼 적확해서 슬프고, 고통스러워서 아름다운 것이 또 있을까 싶었다. 그러다 여자는 문득, Mary는 어쩌다 마리도 매리도 아닌 메리가 되었으며, Mary의 문장들은 어째서 단 하나의 이름으로만 기억되는지 궁금해졌다.
메리: FRANKENSTEIN(1886년 오리지널 초판본 디자인), 메리 셸리, 구자언, 더스토리, 초판 1쇄 2018년 7월 30일, 118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