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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 Jul 23. 2019

시장

百修洞 三十五番地 이야기 : 流浪船

여자는 몇 해 전 생일 이국의 벼룩시장*에 갔다. 여자는 벼룩시장을 좋아했다. 낡은 것들로 가득한 벼룩시장에 가면 자신도 낡고 오래된 것이 된 기분이 들어 마음이 편안해졌다. 한때 사랑받았던 것들을 한 걸음 떨어져 바라보노라면 사랑받았던 적이 있었던가 싶어 조금 우울해지기도 했지만 그것마저도 기분 좋았다.


언젠가는, 받을 날이 오겠지.


한숨처럼 읊조리고 나면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것 같아도 제 나름의 규칙을 가지고 늘어선 오래되어 낡은 물건들의 한 때가 그랬듯, 언젠가는 사랑이라는 것을 받았다는 것을 추억할 날도 오겠지 싶어서 다 괜찮아졌다.

그러나 여자는 시장을 좋아하지 않았다. 시장에만 가면 잡은 손을 놓칠까 무서웠고 가질 수 없는 것들 뿐이어서 서운했고 ‘언젠가는’이라는 시간이 영영 오지 않을 것만 같아서 슬펐다. 그래서 여자에게 새것들로 가득한 시장은 차라리 공포였다.

멀고 먼 나라의 벼룩시장에서 여자는 생일 같은 것 다 소용없다고 생각했다. 그날 이후로 여자는 달력에서 자신의 생일을 지워버렸다. 어려서는 늘 방학이었기 때문에 변변치 못한 파티나마 열지 못하는 때가 많았고, 선물은 아름답고 쓸모없는 것 대신 책 한 권 같은 생필품이 전부였으므로 365일 중 하루쯤 특별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1년 중 하루를 여느 보통날로 매정하게 지워버린 주제에 받고 싶은 마음만큼은 지우지 못했다. 편지 한 장, 편지 한 장이 너무 길면 카드 한 장, 그마저도 길다면 꼬깃꼬깃 접은 쪽지 하나. 무엇을 살 수도 없는 종이 한 장. 여자가 받길 바라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사실 여자가 받고 싶은 것은 종이가 아니라 마음이었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다는 것이 서글퍼서 여자는 이미 보통날로 지워 버린 ‘그 날’을 한 번 더 지웠다. 그러고는 지울 수도 없게 지워진 그 ‘보통날’이 돌아오면 여자는 벼룩시장에 간다. 작고 낡고 오래된 물건을 고르고 골라 값을 치르고 집에 가져와서는 서랍 깊숙이 넣고, 그 서랍을 다른 서랍 깊숙이 넣어 두었다. 다람쥐가 묻어 놓은 도토리를 잊어버리듯 잊어버릴 수 있도록 넣어둔 서랍은 올해로 서른여덟 개가 되었다. 


벼룩시장:  Flea markets in Europe, CHARTWELL BOOKS, INC.,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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