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동 35번지 이야기(feat. 103호의 수료증)
오래된 기억을 들추고 싶어 지는 날이 있다. 예고 없이 문득 찾아드는 ‘그런 날’ 들춰낸 기억 한 장. 꼭 10년 전에 써 놓은 ‘기억 한 장’은 백수동 35번지 103호에 보관되어 있다. 다시 찬찬히 들여다보니 꽤 잘 쓴 기억이다. 지금은 전혀 관심 없는 분야의 정보와 지식을 그때는 그렇게나 소상히 알고 있었다는 것이 신기했고, 다시 꺼내 봐도 어색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싶었다. 그래서 다시, 걸어 본다. 좀 더 잘 보이는 곳에.
written by 벚꽃지다
내 방으로 출근하기 시작한 게 벌써 152일이나 됐다. 일어나자마자 침대를 정리하고 샤워를 하고 컴퓨터 의자에 앉는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일과. 내 방이 아니라 어떤 회사에 다녀도 똑같을 수밖에 없는 순서들. 다만, 출퇴근 거리가 짧다는 게 다르다. 침대에서 책상으로 출근하게 된 것은, 양심에 손을 얹고… 엄마의 잔소리 때문이다. 잔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만원 버스나 지하철을 탈 만한 거리에 있는 곳으로 출근해야겠지만, 그전까지는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내일 당장 진짜 출근이라는 것을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러려면 미리미리 바이오리듬을 잘 맞춰두어야 하니까, 규칙적인 생활은 어쨌든 도움이 되는 것이다.
책상에 앉자마자 제일 먼저 확인하는 것은 뉴스다. 연예와 스포츠 뉴스를 댓글까지 꼼꼼히 읽는다. 기사 끝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또 다른 기사들. 꼬리를 잡다 보면 어느새 점심이다. 간단히 점심을 먹고 다시 컴퓨터에 앉는다. 본격적인 업무를 원활히 진행하기 위한 몸 풀기로 게임을 한다. 마구 던지고 마구 치는 야구 게임이다. 오늘은 SK 정근우를 팔고 국가대표 정근우를 살 생각이다. 오늘을 위해 얼마나 많은 연습을 했던가. 정확한 타이밍에 키를 누르는 민첩함, 적재적소에 아이템 카드를 사용하는 명민함을 키우기 위해 나는 그토록 수많은 게임에서 져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차곡차곡 모은 게임머니로 국가대표 정근우를 산다. 이 게임에서 SK 정근우뿐만 아니라 모든 선수가 태극마크를 달면 몸값이 비싸진다. 그리고 능력치도 2~30 정도 높다. 내 비장의 카드가 회오리 마구 카드라면, 선수들의 비장의 카드는 태극기다. 게임이 시작된다. 오늘은 게임에 속도가 붙는다. 상대편이 내세운 류현진이 괴물처럼 잘 던졌고, 내 쪽의 타선은 엉망, 수비는 진창, 투수는 오늘따라 괴발개발. 순식간에 8회 초. 이래서야 본격적인 업무를 원활히 진행하긴커녕 하루 종일 게임만 하게 생겼다. 첫 번째 주자 병살. 그 뒤로 차근차근 내야 안타 병살, 외야 플라이 아웃. 11대 1 콜드 패. 초반 부진으로 국가대표 정근우를 교체한 것이 문제였나. 역시 야구는 믿음의 야구인가. 그런데 나는 누가 믿어주나. 다음 게임을 위해 라인업을 고르고 있는데 방문이 열린다. 순식간에 방 안을 훑는 매운 시선을 보아하니 엄마다. 이럴 때는 그저 심각한 표정 외에는 답이 없다. 게임을 하다 들켜도, 야동을 보다 걸려도 심각한 표정이어야 한다. 상대를 어이없게 만드는 심각함. 엄마가 긴 한숨과 함께 퇴장한다. 나도 긴 한숨과 함께 게임에서 빠져나온다.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실행시키고 책상을 정리한다. 본격적인 작업을 해야 한다. 매일같이 들여다보는 취업 사이트에 새로운 구인 광고가 올라왔을 리가 없지만 이거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 시간이 안 간다. 연습장을 꺼내 오른쪽에 펼쳐 놓고 검은색, 파란색, 빨간색 펜을 올려놓는다. 검은색은 주 7일, 파란색은 주 6일, 빨간색은 주 5일이다. 연습장에는 검은색과 파란색 글씨가 대부분이고 빨간색 글씨는 먹다 흘린 케첩처럼 드문드문하다. 야구장에 가고 싶다. 햄버거 세트를 사서 야구장에 가고 싶다. 취업 사이트에 로그인하면 그 뒤로는 드래그와 클릭뿐이다. 내리고 클릭, 다음 페이지, 내리고 클릭, 또 다음 페이지…. 그렇게 또 하루가 가는 거다. 끝내 쓰지 못한 국가대표 정근우 카드와 11대 1이라는 숫자와 취업 사이트와 주 5일과 주 6일과 주 7일과…. 태극기를 붙이고 능력치가 25나 오른 정근우를 썼더라면, 콜드 패라도 면했다면 오늘 내 경력에 꼭 맞는 구인 광고를 발견할 수 있었을까. 취업 사이트는 어느새 뒷전으로 밀려나고 세 가지 색 펜을 번갈아 가며 되는 대로 낙서를 한다. 무심코 그린 동그라미는 태극무늬가 되고 만화 속 까치 눈썹이 모여 괘를 이룬다. 어디서 많이 봤다 싶더니 태극기다. 이게 잘 그린 건지 못 그린 건지 눈치가 보이고 뒤통수가 가렵다. 그때 방문이 리고 느긋한 시선이 뒤통수에 꽂힌다. 아빠다.
“밥 먹자.”
“네.”
한숨도 없이 아빠가 나가고 태극기 부분을 손으로 찢는다. 손바닥만 한 태극기를 가슴에 대 본다. 우리나라 모든 스포츠 선수들이 가슴에 품은 비장의 카드가 내 가슴에도 있다. 어쩐지 능력치가 올라가는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가슴에 묵직하고 미지근한 것이 차오르는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입에 침이 고인다. 오늘 저녁엔 어떤 반찬이 나오려나.
2009/04/07
백수동 35번지의 여자에게 ‘수료증’을 주었던 한페이지 단편소설은 소설가 서진이 2003년 4월부터 2016년 12월까지 운영한 대안 출판 프로젝트로, 응모자들의 한 페이지 단편소설을 모아 선정작을 고르고 자체 단행본과 잡지를 출판했다. 2017년 1월 1일부터 휴면 상태로 선정작만 랜덤 페이지로 보여진다. 타이핑하기 싫어서 랜덤으로 보이는 육백 여덟 번째 <비장의 카드>를 찾기 위해 자못 비장한 마음으로 ‘F5’ 키를 쉴 새 없이 눌렀다. 세 번만에 제 때 멈출 수 있었고, 그래서 제법 뿌듯해진 마음으로 이 곳에 걸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