百修洞 三十五番地 이야기 : 流浪船
움직이는 그림을 만들고 싶었다. 그림을 그릴 수는 없지만 그림 그리기에 좋은 이야기를 갖고 있으면 그림 그릴 수 있는 사람은 찾을 수 있다. 그림 그릴 수 있는 사람 찾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보다 먼저 이야기가 있어야 했다. 재미있고 함축적인데 생각할 거리가 있어 여운이 남는, 그런 움직이는 그림. 이게 무슨 말이야, 방구야 싶지만 목표가 높으면 가 닿지 못해도 조금은 올라갈 수 있을 테니까. 원대한 목표에 얼마나 다가갈 수 있을지 사전 조사하기 위해 세 폭의 도형도*를 구입했다. 무엇이 궁금하면 무엇을 이루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부터 찾아보는 습관 때문이다. 이야기의 3요소, 도형의 3요소, 빛의 3요소… 그런 요소들에 대해 찾아보곤 한다. 요소마다 배치되어 있는 요소들을 살피다 보면 명확해지키는커녕 길을 잃기 십상이고, 각 요소가 가리키는 방향에 둘러싸여 아주 갇혀버리는 일도 생기곤 하지만 운이 좋으면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 수도 있다. 정말 운이 좋으면 ‘무엇’에 대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무엇의 무엇을 보고 있는지, 그 무엇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도 알 수 있다.
도형의 3요소를 충실히 재현하고 있는 이 도형도가 기대했던 것보다 더 마음에 들었던 것은 그림에 찍혀 있는 낙관 때문이었다. 종이 위에 찍혀 있었는데 마치 랜티큘러처럼 이렇게 보면 물음표, 저렇게 보면 느낌표처럼 보이는 낙관이었다. 점, 선, 면만을 사용해 그린 도형도였고 예상했던 도형들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보고 안심하려던 순간 눈에 들어온 낙관이 ‘힝, 속았지?!’라고 짓궂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그 예상치 못한 속삭임에 너무 놀라 어디서부터 잘못 본 것인지 다시 살펴볼 수도 없게 멍해지고 마는 것이다. 정신을 차리기 무섭게 ‘속삭임’의 의미가 무엇인지 찾으려고 미친 듯이 헤매게 되고, 한참을 헤맨 후에야 ‘그냥’ 물음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다다르게 된다. 난 그저 물음표 모양일 뿐인데 당신 스스로 질문하고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안간힘을 쓴 거야, 라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고. 기호에 길들여져 한낱 물음표 모양에 놀아난 것이라고 해도 불쾌한 경험은 아니다. 마음 한 구석에 뭐가 박혀 있는 기분이 들지만 못이나 돌멩이가 아니라 씨앗이 박힌 것 같아 찜찜하기보다 궁금해진다. 마음에 박힌 씨앗이 언젠가 싹을 틔울지, 틔운다면 무엇으로 자랄지 궁금해지는 것이다.
도형들
- 세모, 존 클라센 · 맥 바넷 / 서남희, 시공사, 1판 2쇄 2018년 11월 15일, 15000원
- 네모, 존 클라센 · 맥 바넷 / 서남희, 시공사, 1판 1쇄 2018년 8월 15일, 15000원
- 동그라미, 존 클라센 / 맥 바넷 / 서남희, 시공사, 1판 1쇄 2019년 5월, 15000원
연관된 이야기 207호: 畫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