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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 Nov 24. 2019

거리두기

百修洞 三十五番地 이야기 : 流浪船

Photo by Jennifer Burk on Unsplash

여자는 거리두기를 좋아한다. 좋아하지만 하지 못하는 것 중에 하나가 거리두기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무엇에 건 거리두기 하는 모습을 바라보길 좋아한다. 누군가와 무엇의 사이를 가늠해보고 서 있는 모양을 뜯어보고 누군가와 무엇 사이를 오가는 것들을 지켜보면서 어떡하면 거리두기를 할 수 있는지, 잘하는 방법은 무엇인지 고민하기를 좋아한다. 잘하는 방법을 고민한다는 것은 잘 못하기 때문이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데 나날이 좁아지는 여자의 인간관계는 눈에서 멀어진다고 해서 마음에서도 쉽게 멀어지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쉽사리 마음을 꺼내지 못할 뿐, 눈 앞에 두었을 때보다 멀리 두었을 때 한 번이라도 더 생각하는 짝사랑을 벌써 몇 년째 하고 있다. 이런 짝사랑이라고 부르기에도 사랑이라고 부르기에도 애매한 이 행태는 거리두기의 나쁜 예일지도 모른다. 관계가 아니라면 거리두기는 쉽다. 이를테면 종교 같은 것. 헤아리기도 힘들 만큼 오래 멀리 떨어져 있는 여자의 종교는 천주교다. 누군가 종교가 무엇이냐 물을 때, 기독교인이냐는 추궁 섞인 질문을 할 때 궁여지책으로 답하는 공식 종교다. 그래도 신은 믿는다. 멀찌감치 떨어져 지내보니 문득 안부가 궁금하고, 어쩌다 신의 안부까지 궁금해지는지 궁금해지는데 그렇다고 직접 만나러 가기에는 거추장스러운 것들이 너무 많아서 이런 궁리, 저런 궁리를 하다가 줄자*를 찾았다. 승리한 사람의 입에서 승리만을 바라는 사람의 입으로 승리의 여운에 푹 빠진 사람의 입에서 승리를 추억하는 사람의 입으로… 어쩌다 한 두어 번쯤의 실패-무려 패배가 아닌!-를 끼워준 일도 있었던 것 같지만 승리에게서 승리에게로 전해진 이야기를 칭칭 휘감은 사람을 정확하게 측량해 주겠다는 줄자였다. 그 숱한 이야기를 걷어내고, 걷어내진 못하더라도 숱한 이야기들의 두께라도 알려줄 수 있다는 줄자였다.

단출한 포장을 뜯고 꺼낸 줄자는 두꺼운 이야기를 단숨에 뚫고 들어가 곧장 신에게 가 닿았다. 그렇다고 신과 여자 사이의 거리를 정확히 잴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놀라웠다. 여자는 안과 밖을 뒤집어 맞붙여 놓았을 때처럼 생경한 기분이 들었다. 신이면서 신이 아니었고 인간이었지만 인간이 아니었다. 경계는 흐려졌지만 거리감은 또렷해졌다. 그것만으로도 줄자는 제 역할을 다 한 것이었다.

여자는 문득 여태 고민해왔던 거리두기라는 것, 애초에 거리라는 것을 잘못 재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대 자로 쿡쿡 찌르듯 재는 것이 아니라, 한쪽 끝을 놓으면 촤르륵 말려들어가 자칫 손을 다칠 수 있는 줄자가 아니라, 한데 모아 묶어둘 수도 있고 늘어뜨리듯 걸어 둘 수도 있는 줄자를 썼어야 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길이만큼 오고 가는 수고를, 한 끝을 고정시키기 위해 팔 넓이만큼씩 옮겨가는 수고를 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미 늦었다. 어그러진 관계는 대부분 돌이킬 수 없으니까 늦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수밖에 없는 것, 늦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아파하기만 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좀 더 좋은 줄자를 마련해두고 좀 더 조심스럽게 쓸 날이 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줄자: 성서를 읽다, 박상익, 유유, 초판 1쇄 2016년 9월 24일, 1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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