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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 Mar 14. 2020

百修洞 三十五番地 이야기 : 流浪船

Photo by Alexander Krivitskiy on Unsplash

여자는 다시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었다. 얼마나 깊은 곳에 앉아 있는지 가늠해 보려고 고개를 들면 일렁이는 물그림자 너머로 이지러진 구름이 어룽거렸다. 그 모습이 마치 바람과 바람 사이에 선 사람의 헝클어진 머리칼처럼 보여서 여자는 문득 여기 있어요, 라는 말을 대신해 손이라도 흔들고 싶어졌다. 하지만 손을 들어올릴 기운도 남아있지 않았다.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개를 들고 있는 것 뿐. 

여자는 자신이 며칠이나 가라앉아 있었는지 헝클어진 머리칼이 얼마나 거기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조금 더 깊은 곳으로 옮겨가고 싶었지만 여자가 앉아 있는 바닥 아래에는 더 이상 바닥이 없는 것 같았다. 부탁해야겠어. 여자가 깊은 곳에 가라앉은 이후 처음으로 입 밖에 꺼낸 말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부탁해야 하는지, 저 헝클어진 머리칼이 정말 도와줄 수 있는 존재인지 알 수 없었다. 그때 헝클어진 머리칼이 일렁이는 물그림자를 지나오는 것이 보였다. 반가워야 할지 무서워야 할지 고민하는 동안 희고 깨끗한 발 하나가 여자 앞에 멈춰 섰다. 여자와 같은 여자인지 여자와 다른 여자인지 여자와 다른 남자인지 여자와 같은 남자인지 이도저도 아닌 존재인지 알 수 없는 존재가 *을 추기 시작했다. 어디로 향하려는 것인지 무엇을 가리키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춤사위는 오롯한 感이었다. 세상을 거니는 모든 感 가운데 이름이 있는 것, 이름 없는 것까지 모두 담은 춤이 시작되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차곡차곡 쌓이는 빗방울들이 여자를 겹겹이 감싸 안았다. 희고 깨끗하고 가지런해서 예쁜 발이 마흔 아홉 번째 춤을 끝냈을 때 여자는 빗방울에 둘러싸여 떠오르고 있었다. 그 빗방울 속에서 여자는 바닥보다 깊은 곳으로 가라앉는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 여자는 겨울의 미소를 보며 생각했다. 밖은 왜 늘 아픈가.


춤: 죽음의 자서전, 김혜순, 문학실험실, 초판 4쇄 2019년 5월 31일, 9000원

    「겨울의 미소(열아흐레)」 제목 인용, 「포르말린 강가에서(서른사흘)」 중 일부 발췌, 『죽음의 자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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