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정 Apr 26. 2020

그림 같은 것 밖에 할 줄 모르는

百修洞 三十五番地 이야기 : 流浪船

The Chess Players, c. 1670 / Cornelis de Man(1621-1706, Dutch)

몇 년 전 어느 계절에 여자는 화첩* 한 권을 선물 받았다. 백수동 35번지에 사는 백수의 ‘첫 아이’, 『고양이가 필요해』를 선물한 것에 대한 보답이었다. 고양이에 관한 글을 주고 고양이에 관한 글과 그림을 받았으니 되로 주고 말로 받은 셈이었다. 그게 고마워서 또 모바일 커피 상품권을 보냈다. 주고받는 일이 끝나고 화첩이 남았다.


화첩은 오래된 기억 속의 한 장면 같은 것이었다. 한 생명에 대한 평가와 판단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기억의 일부를 기록해 둔 것이다. ‘지금’ ‘그’ 생명에 대한 평가와 판단은 무의미하다. 어떤 생명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오만은 오직 인간만이 저지를 수 있는 오류다. 어쩌면 멸망을 불러올지도 모르는 오류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 못내 슬프다. 기억 속의 생명은 ‘지금’처럼 찬란하고 하찮으며 아름답고 슬펐다. 그 모든 감정과 감각이 色으로 남았다. 아름다우면서도 쓸모 있으려면 슬퍼야 하는가, 여자는 그런 생각을 했다. 슬프지 않으면 무엇도 생각하지 않으려는 것이 인간인가, 여자는 그런 생각도 해 보았다. 그래서 여자는 종종 책장에서 화첩을 꺼내 가만히 쓸어 보았다. 그러다 조금 우울한 날에는 화첩을 화라락, 넘기다 한 장면씩 마주 보며 겪지 못했던 ‘그때’를 사무치도록 슬퍼했다. 그림 같은 것 밖에 할 줄 모르는 그 생명에서 비롯된 슬픔이 모든 생명을 물들였기 때문이었다.


화첩: 그림이 야옹야옹 고양이 미술사, 이동섭, 아트북스, 초판 2016년 12월 20일, 15000원


연결된 이야기: 펜트하우스

매거진의 이전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