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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 Jun 09. 2020

'밥'이라는 한 글자에 담긴 이상동몽(異床同夢)

Aa Writer: 김치찌개에 소주를 마시다

오랜만에 만난 ㅂ은 조금 수척해 보였다. 요즘처럼 일이 없어 고단한 나날이 이어지는 와중에 불행 중 다행으로 바빴고, 바쁜 탓에 잠을 잘 시간이 부족했단다. 일 이야기보다 밥이 우선인 상황이었다. 밥 먹으러 가자고 하고, 술을 떠올린 우리는 김치찌개 파는 가게를 찾아 들어갔다. 쌀쌀한 저녁이었고 몸은 고단하고 마음은 허전했기 때문이었다. 우리에게는 고단한 몸에 힘을 주고 허전한 마음을 따뜻하게 채워 줄 음식이 필요했다.

마주 앉은 우리는 김치찌개 2인분에 '빨간 거' 한 병 주문하고선 결국 '코로나' 세 글자로 귀결되고 만다는 것을 알면서도 서로의 근황을 묻고 들었다. 길어질 것 없는 안부 끝에 일 이야기를 시작하려는데 기본 찬과 소주가 나왔다. 첫 잔을 단숨에 털어 넣은 ㅂ이 멸치볶음을 집어 먹으며 말했다.


- 나는 간장 멸치볶음보다 고춧가루 들어간 멸치볶음을 더 좋아해.

- 난 호두나 땅콩 들어간 게 좋던데… 왜?


ㅂ에게는 두 살 터울의 동생이 있었다. 방 두 칸짜리 집에 살던 어린 시절, 남매는 방 하나를 같이 썼다고 했다. 어느 밤, 문득 잠에서 깨어 장난을 치며 놀던 남매는 배가 고파졌다. 행여 부모님이 깰까 뒤꿈치를 들고 살그머니 부엌으로 가 부엌 한편에 있는 압력밥솥에서 식은 밥을 푸고, 냉장고에서 멸치볶음이 담긴 통을 꺼내 방으로 돌아온 것은 ㅂ이었다. 남매는 "소리 소문 없이" 배를 채우려고 이불을 뒤집어쓴 채 찬밥과 멸치볶음을 나누어 먹다가 스르르 잠들고 말았다. ㅂ은 아직도 입안에서 굴러다니던 고슬고슬한 밥, 칼칼하게 매콤하고 쫀득쫀득하게 달콤하고 고소한 멸치볶음이 여태 생생하다고 했다. 다음날 아침 ㅂ은 어머니께 호되게 혼이 났다.


- 그때 동생이 오빠가 그랬다고 해서 엄마한테 나만 혼났어.

- 동생은 자기가 이른 걸 기억해?

- 응. 동생도 똑같이 기억난대. 가끔 그때 얘기하면 똑같이 기억해.

- 그때 그 멸치볶음이 고춧가루 들어간 거?


ㅂ은 대답 대신 따끈한 밥을 크게 한술 떠먹더니 멸치볶음을 집어 먹었다. 우리는 한동안 돼지고기가 푸짐하게 들어간 김치찌개와 찌개 국물을 끼얹어 한입 먹으면 고슬고슬한 밥알이 알알이 돌아다니는 공깃밥과 고춧가루 뿌려 만든 멸치볶음과 어묵볶음, 콩나물 무침과 깍두기에 집중했다. 목이 메일 것 같으면 소주 한 모금으로 넘기면서 소박한 한 상을 거창하게 만끽했다.


- 오늘따라 진짜 밥맛 좋다.

- 딱 이 밥 먹는 거 같지 않냐?


ㅂ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스마트폰 사진첩을 뒤적이더니 사진 한 장을 보여주었다. 사진 속에는 말갛고 하얀 밥공기가 있고, 밥공기 뚜껑에 '밥'이라고 쓴 쪽지가 붙어 있었다. 여기 밥 있다. 밥 먹어라. 밥은 먹고 다녀야지. '밥'이라는 글자 하나에 세 가지 염려와 당부와 애정이 모두 담겨 있었다.


ⓒ fantastic scar pink


- 이 사진은 뭐지? 밥 안 먹으면 등짝 한 대 맞을 것 같은데?

- 옛날에 나 자취할 때 엄마가 와서 차려놓고 가면서 써 놓은 거야.

- 우와… 어머니가 달필이시네.

- 초등학교 선생님이셨거든.


ㅂ의 어머니는 ㅂ의 자취방에 찬을 가져다 두실 때마다 밥과 반찬 그릇에 쪽지를 붙여두셨다고 했다. 찬들은 냉장고에, 밥은 식탁 위에 올려두고 밥은 '밥', 김치는 '김치', 멸치볶음은 '멸치볶음'…. 그렇게 쪽지를 붙여두셨다. ㅂ은 그 글자들이 너무 맛있었다. ㅂ은 어머니가 지은 밥이 떠오르는 글씨, 밥보다 더 맛있는 '밥'이라는 한 글자에 마음까지 따끈해지곤 했다.


- 항상 메모지를 찢어서 쓰고 스카치테이프로 붙여두고 가셨어.

- 밑에 깔아 두시거나 하지 않고?

- 정신없는 애니까. 안 열어보거나 한쪽으로 치워두고 다른 거 할까 봐 꼭 뚜껑 위에다 붙여두신 거야.

- 어떡허든 꼭 먹으라고 그렇게 하셨는가 보네.

- 그때 그 상황이 오래 기억에 남더라.

- 그때 상황이 어땠는데?

- 밥도 있고, 멸치볶음도 있는데 엄마는 없었지.


ㅂ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고모가 엄마인 줄 알았다고 했다. 부모님은 당시 주말부부로 지내셨고, 어머니는 주말이면 지방에 계신 아버지에게 가느라 집을 비우셨다. 그렇지 않더라도 워낙 활동적인 어머니였던 터라 집에 계시는 일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ㅂ은 언제나 어머니의 부재를 '밥'이나 '멸치볶음' 같은 글자로 확인했다. 어머니의 쪽지를 마주할 때마다 ㅂ은 어머니가 없음을 실감했을 거였다. 실제로 어머니는 ㅂ의 곁에 없었지만 한 편으로는 함께 있는 것과 다름없었을 것이다. 동상이몽(同床異夢)이 아니라 이상동몽(異床同夢), ㅂ과 ㅂ의 어머니는 밥 한 공기, 멸치볶음 한 접시를 가지고 서로 다른 곳에서 같은 생각을 했을지도 몰랐다.


- 그래서 제때 밥 챙겨 먹고 등짝 안 맞았어?

- 바로 못 먹고 냉장고에 넣어 놨다가 이틀 뒤엔가 볶음밥 해 먹었어.

- 왜- 어머니가 그렇게까지 해두고 가셨는데 바로 먹었어야지.

- 멧밥 같아서 못 먹겠더라고.

- 멧밥? 제사상에 올리는 밥?

- 도자기에 뚜껑까지 있어서 그런지 괜히 멧밥 같더라고.


나는 ㅂ이 말 하는 멧밥의 '메'가 정말 '메'인지 아니면 '매'인지, 의외로 '뫼'인지 헛갈려 스마트폰을 꺼내 사전을 뒤적였다. 정답은 '메', 제사 때 신위 앞에 놓는 밥을 뜻하고 궁중에서 밥을 이르던 말이기도 했다. 밥은 역시 고봉밥이니까, 그릇에 밥을 산봉우리처럼 쌓아 올려야 제 맛이니까 '뫼'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심지어 고봉밥의 '봉'자는 봉우리는커녕 산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받들다', '섬기다', '의지하다'는 뜻을 가진 한자어였고 봉우리는 순 우리말이었다. 역시 밥을 앞에 두고 '말'이 많아지는 것은 좋지 못한 일이었다. 그렇게 알다가도 모를 말들 속에서도 밥은 여전히 맛있었기 때문에 ㅂ과 나는 '빨간 거'를 한 병 더 추가할지 말지 진지하게 의논했다. 햄 사리 추가를 전제로 소주 한 병 더 주문하고 우리는 비로소 일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늘 그렇듯이 일 이야기는 간단하고 명료하게 마무리되었고 그러는 동안 햄 사리를 추가한 김치찌개는 애매한 양이 남아서 우리는 공깃밥 하나를 더 시켜 나눠 먹을지 말지를 고민하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넘치는 건 모자람만 못하니까, 아무리 맛있는 밥이라도 아무리 돈 쥐어주겠다는 일이어도.


ㅂ과 헤어져 집에 돌아오자마자 어쩐지 입이 심심해 찬장에서 간식거리를 뒤지다 얼마 전 사다 놓은 즉석밥이 눈에 띄었다. ㅂ이 왜 식탁 위에 정갈하게 차려진 밥 한 공기가 멧밥 같다고 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ㅂ의 어머니는 '메'의 두 번째 뜻을 알고 계셨을까. 모르셨대도 귀한 사람이 먹을 밥이니 귀하게 담아 두셨을 것은 분명했다. ㅂ과 ㅂ의 어머니는 언제나 함께 있지 못했어도 마음만큼은 이어져 있었을 테니까. ㅂ은 그렇게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귀하게 자라 어엿하게 귀한 사람이 되었다. 나도 그렇게 자랐겠지, 어쩌면 나도 귀한 사람이겠지. 그리고 당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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