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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하루가 쌓이는 중이었다. 술을 마시지 못하는 날들이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몇 년째 건강검진이 미뤄지고 있었고, 연이어 급체로 고생하고 나니 미룰 수밖에 없었던 건강검진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생애 처음으로 수면내시경 검사를 했다. 그 “유명한” 프로포폴에 대한 기대가 컸는데 역시나 숫자를 셀 겨를도 없이 깜빡, 늪 깊은 곳으로 떨어졌다 올라오니 모든 것이 끝나 있었다. 오른쪽 어깨를 흔들어 깨워 준 간호사에게 물었다.
제가 이상한 행동이나 말을 하진 않았나요?
아무 일도 없었어요. 뉴스에 나와 버릇해서 그렇지 다들 얌전하세요.
간호사가 거짓말하고 있다기에는 너무나 상냥했다. 상냥하고 친절한 사람에게 한없이 무너지고 마는 사람인지라 간호사의 말을 찰떡같이 믿었다. ‘그러려니’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비틀비틀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들어간 진료실에서 의사가 말했다. 용종이 두 개 있고 위가 부었다고. 어쩐지 재미있었다. 남들은 간이 부어 배 밖으로 나온다든데 나는 위가 부었네. 그럼 간은 괜.찮.을.까. 위가 아프다는데 간을 걱정하고 있던 나에게 의사는 술도, 담배도 다… 쉬라고, 쉬어야 한다고, 한 달하고도 반이나 쉬어야 한다고 했다. 용종 때문도 아니고 그 “유명한” 헬리코박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쉬었는데, 쉬려고 했는데… 쉴 수 없는 상황들이 이어졌다. 그래도 꿋꿋하게 열흘 가까이 쉬었는데, 더 쉬려고 했는데… 방아쇠가 당겨졌다.
총알은 날아갔고 날아간 총알이 갈 곳은 뭐, 술 밖에 더 있나. 그 와중에 건강 챙기겠다고 와인을 샀다. 희한하게 와인은, 뭐랄까, 좀 건강한 이미지랄까. 집더하기에서만 구입할 수 있는 최저가 와인, 무려 한글로 -식품위생법 제10조 및 주세법에 의한 한글표시사항을 적어 놓은 스티커에- ‘까베네 쇼비뇽’이라고 쓰여있었지만 굳이 ‘꺄ㅎ르네ㅎ 쇼ㅎ비뇽’이라고, 한껏 허세 부려 읽으며 와인을 샀다. 고작 4,990원짜리 와인이지만, 심지어 ‘미국산’이지만 와인이니까 프랑스 느낌 실어서 읽어야 할 것 같은 편견 때문이었다. 그랬다, 나는 편견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이었다. 그저 장난을 치고 싶었는데 받아줄 사람이 없는 사람이기도 했다. 어쨌든 코르크 마개 없는 와인 한 병에 무말랭이 한 팩을 끼워 파는 수육보쌈 한 팩, 훈제 삼겹살 한 팩, 골뱅이 비빔 한 팩을 샀다. 집더하기에 적립하는 마일리지 번호 때문에 계산원 분과 잠시 실랑이가 있었지만 -1년 남짓 들을 수 없었던 음악을 다시 듣기 시작했기 때문에 무선 이어폰을 끼고 있었다- ‘일시정지’를 누르지 않고 계산을 마쳤고, 집더하기에서 집까지 버스로 두 정거장을 걸었다.
집에 오자마자 와인 병뚜껑을 따놓고 -나름의 디캔팅이랄까- 날아든 택배를, 집안을, 나를 정리하고 수육보쌈을 데우고 골뱅이 비빔을 비비고 벼르던 드라마 <싸이코지만 괜찮아> 1회를 재생했다. 그때까지도, 지금까지도 머릿속은 어지럽다. 다, 무슨, 소용인가 싶은 생각들로 어지럽다. <싸이코지만 괜찮다>는 편집도 발랄하고 아트웍도 상당한데 제값은 다 치렀을까 싶은 게 안 그래도 어지러운 머릿속이 더 어지러워진 것이다. 그 와중에 ‘예쁜 거’ 옆에 ‘예쁜 거’가 있어서 더 정신이 어지럽다. 표정도, 감정도 없는 것이 예쁠 수도 있구나 싶고 표정도 감정도 과잉인 것이 예쁠 수도 있구나 싶고. 오정세 배우는 자판기 버튼 누르면 나오는 음료처럼 연기하는데도 늘 70%를 보여준다. 못해도 70, 좋으면 80 정도의 감정과 표현, 진정한 “후로훼셔널”만이 보여줄 수 있다는 그 경지. 대단하고 멋지다. 한낱 회사원들은 100%를 못 해서 안달이고, 잘리고, 욕먹는데. 사장들은 100%에서 1%를 더 짜내지 못해 안달이고, 자르고, 욕하는데. 100%가 아니라 70%라는 걸 왜들 모르는지. 그러다 쫄딱 0% 되는 거를, 상처만 남는 거를…. 그러니까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고. 이 차이를 어떻게 줄일 수 있는지 모르겠다. 그냥 사람을 미워하고 싫어하지 않을 수 있기만 바랄 뿐. 하지만 그건 혼자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아파하는 수밖에,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파하는 것뿐이다.
그러니까 여러분, 술을 마시려면 매일 마셔야지 어쩌다 마시면 두서없고 정신없고 미친년 널뛰듯 감정이 널을 뜁니다. 매일 조금씩 꾸준히, 그게 술이든 일이든 작업이든 사랑이든 미워하든 뭐든 매일 꾸준히 해야 해요. 미치면 미친다잖아요. 제대로 미칠 때까지 매일 꾸준히. 그렇게 매일, 어제가 내일인 것처럼 오늘이 어제인 것처럼 꾸준히 그렇게 살아요. 우리. 어떡 허든 일단은 살아봐요.
아, 와인만 마시면 감성이 터지는 걸 보면 아무래도 나는 와인 타입은 아닌가 보다. 하지만 건강을 위해서라면(?) 소주보단 역시 와인인 걸까. 경애하는 스승님께 여쭤봐야겠다. 늘 정답은 말씀해 주시지 않으니 이번에도 어딘가를 가리키시겠지, 가리키는 곳에 뭐든 있겠지, 포근한 어떤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