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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 Jun 23. 2020

전문가 VS 전문가

百修洞 三十五番地 이야기 : 동네북

앞집에 사는 분의 소개로 교수님*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교수님은 지구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처음 : 오늘날 가장 큰 비극은 비극을 비극으로 느끼지 못한다는 데 있다.
마지막 : 오늘날 가장 중요한 ‘결정’들 중 일부가 당황스럽게도 인간의 손에서 내려지고, 자연은 인간의 결정에 갑작스러운 변화로 응수한다는 것을 제외하면, 세계는 여전히 수많은 가능성에 열려있다.


지구의 역사가 아니라 다른 어떤 것을 대입해도 자연스러운 처음과 마지막이었다. 교수님이 차분하게 들려준 ‘가운데 토막’은 갈치구이 같았다. 가시 발라내기 까다롭고 번거롭고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이렇게까지 해가며 먹어야 하나 싶어도 막상 갓 지은 쌀밥에 올려 -오징어젓갈 같은 젓갈류를 곁들이면 더 좋을 것이다- 한 입 먹으면 역시 생선 구이는 갈치 구이지, 하게 되기 때문이다. 가시를 다 발라낸 듯 보여도 굵은 가시 하나가 숨어 있어 입천장을 찌르기도 하고, 아무리 봐도 가시가 있는 것 같은데 막상 입에 넣으면 사르르 녹아버리는 것이 알 듯 말듯한 교수님의 설명과 딱 맞아떨어졌다. 그러니까 상 위에 오른 갈치가 어느 바다에서 어느 해에 어떤 낚시꾼에게 잡혀 얼마만큼의 탄소발자국을 찍으며 왔는지 세세히 알지 못하면 자꾸 있는 가시, 없는 가시를 찾게 되었다. 그런데도 처음과 마지막은 명쾌했고, 그 명쾌함에 일말의 찝찝함도 없는 것을 보면 교수님이 들려준 이야기가 꽤 흥미로웠나 보다. 그도 그럴 것이 바로 ‘지금’과 ‘선택’에 관한 이야기였으니 흥미롭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교수님의 이야기와는 별개로 전문가의 경지에 대한 고민을 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할 수 있다면 그것이 정말 전문가라는 것. 하지만 전문가도 종류가 여러 가지 아닐까. 범용 전문가와 전문가용 전문가. 교수님은 전문가용 전문가인 셈이었다. 어쩐지 자꾸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범용 전문가를 알고 있다면 소개해 달라고 부탁하고 싶더라니. 내가 굳이 전문가가 된다면 범용 전문가에 가까울 텐데 아무리 그래도 너무 본디 없는 거 아닌가 싶어 어디선가 누군가로부터 전문가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한없이 작아지고 만다. 범용이든 전문가용이든 전문가의 길은 어렵다. 어렵고 말고.


 교수님: 인류세, 클라이브 해밀턴/정서진, 이상북스, 초판 1쇄 2018년 9월 25일, 1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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