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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 Aug 30. 2020

뭔 말인지 모르겠지만 뭔 말인지 알겠어요

百修洞 三十五番地 이야기 : 流浪船

Photo by Gayatri Malhotra on Unsplash

여자는 숫자라면 젬병이었다. 사칙연산이 여자가 다룰 수 있는 숫자의 최대치였고 그나마도 종종 이 숫자와 저 숫자를 바꿔 쓰고, 곱해야 할 때 빼기를 하는 바람에 애를 먹곤 했다. 그러니 숫자보다 알파벳이나 요상한 기호가 섞인 수학은 낫 놓고 기억자도 모르는 것이 당연했고 시쳇말로 두 손 번쩍 들어 환영하듯 ‘수포자’의 세계로 들어갔다. 잠시 잠깐 좋은 교사를 만나 수학에 흥미를 갖기도 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그런데 어쩌다가 모든 순간이 물리학이라고 주장하는 박사님*을 찾아갔는지 여자가 생각하기에도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순도 100%의 호기심만 들고 찾아간 터라, 박사님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도 몰랐고 긴장할 일도 없었는데 그런 것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박사님은 여자를 오래 알던 친구를 맞이하듯 맞아 주었다. 여자는 박사님과 한동안 말없이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았는데 그제야 여자는 박사님에게 압도당했다.

여자가 쭈뼛거리며 저기, 물…이라고 입을 떼자마자 박사님은 청산유수로 물리학의 모든 순간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사실 여자는 물 한 잔 마실 수 있겠느냐고 물으려던 거였는데, 물 마시고 싶었다는 것도 잊을 만큼 박사님의 이야기에 푹 빠져들었다. 박사님의 이야기는 귀에 쏙쏙 들어왔는데 머릿속에서 차례로 줄을 서다가 이것저것 엉키다가 제멋대로였다. 그래서 여자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밖에 없었다.


박사님… 뭔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는데 뭔 말인지 다 알겠어요. 어쨌거나 님, 좀, 겁나 짱인 듯.


박사님: 모든 순간의 물리학, 카를로 로벨리/김현주, ㈜쌤앤파커스, 1판 19쇄 2020년 1월 17일, 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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