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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 Oct 27. 2021

하다 하다 술을 구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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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다 하다 술을 구독하기 시작했다.

첫 구독은 아마도 UPA, 멋모르고 캠퍼스를 뛰어다니던 그때 그 시절, 교재 말고 '시간들'이라든가 뭐, 그런 걸 들고 다녀야 한다고 생각했던 '그때 그 시절'에 아웃바운드 상담사의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 구독한 '시간들'이 내 생애 첫 구독이었다. 거절을 못해 피 같은 알바비를 꼬박꼬박 2~3년쯤 낸 붓고 난 뒤에야 간신히 끊을 수 있었던 그 고리. 그리고 생애 두 번째로 구독한 것은 '가슴'이었다. <월간 가슴> 그 네 글자가 그 자체로 설렘이었다. 헤질 때까지, 헤지는 줄도 몰랐던 그 '가슴'을 매달 관심 가져 주겠다니, 아무도 내게 관심 갖지 않는다 여기던 '그때 그 시절'에 <월간 가슴>은 정말 설렘이었다. 그 후로 몇 번의 구독이 바람처럼 지나갔다.

그러다 술을 구독하기 시작했다.

사실 '하다 하다' 술도 구독 서비스를 한다는 것을 알고 해가 넘도록 망설였다. 뭐랄까, 독한 맛이 없달까. 곱고 보송보송한 것들이 알아야 뭘 알겠냐 싶은, 고까운 마음이 들었다. 아유, 내 '영역'은 내가 지키고 싶은 마음이랄까. 내 영역을 침범당했다 생각했고, 구독 열풍이 드세게 일던 그때 그 술 구독은 경쟁자에 지나지 않았으니 취익취익, '오리지널' 병에 분무기를 꽂아 사방팔방 뿌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통장 잔고가 바닥으로 달음박질치고 있는 모습을 말끄러미 바라만 보던 그날, 안 되겠다 싶어 술 구독을 신청했다. 

그렇게 세 병이 도착했다. 생전 처음 보는 술들이. 그리고 술병을 따자마자 고양이들이 사방팔방 뛰어다니기 시작했고, 술을 엎지를까, 넘어뜨릴까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저희들 사룟값 버는 줄도 모르고 엎지르지 못해 안달인 고양이들이라니. 그저 귀엽지. 귀여울 밖에. 그렇지만 저 술병에서 술 한 방울이라도 넘쳐흐르면 미, 미워할 거야. 이, 일분... 정도. 한 방울에 일분씩 치면 느들, 으? 증말, 이러다가 하루 종일 미워하는 수가 있어.

각설하고 첫 번째 개봉 술은 '오향주'다. 술의 재료와 만듦새와 맛과 그에 어울리는 안주까지 세심하게 적어 놓은 카드가 있었는데 내가 준비한 안주와 '페어링'되는 술이 없어서, 그냥 약 삼아 마실 술로 고른 첫 번째 술이다. 왜냐하면 2차 접종하고 아팠거든. 술 마시고 싶은 거 정말 엄청 참았거든. 몸 차리고 나서 마시는 술이라면 응당 약주여야 하니까 고른 술이다. 낮은 도수를 얕보았다가 꽤 기분이 좋아졌다. 술을 향으로 마신다는 말을 어디선가 바람결에 들었는데. 약주라서 선아배에 마셨다. 넘치도록 술을 따르면 가운데 솟은 기둥으로 술이 흘러 들어가 잔 받침에 고이는 잔. 만월이면 넘쳐흐른다고 알려주는 잔에 약주를 따라 마셨다. 아이, 낭만적이야. 처음 선아배를 발견하고는 나를 위한 잔이라고 여겼는데, 나는 잔 받침에 고인 술 한 방울까지 핥핥 모조리 마셔버릴 위인이라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아차차, 한 방울 흘리고 말았다.

하지만 체신머리 없이 떨어뜨린 한 방울을 핥핥 핥아먹지는 않았다. 한 방울쯤, 고양이가 지나가다 툭 떨굴 수도 있는 거니까. 어쨌든 기대 이상으로 맛이 좋았다. 소주는 많이 마시면 홍시 향이 나는데, 이 약주는 한 병 다 비우고 났더니 뭐랄까 엄청 기분 좋게 상큼한 과일 향이 났다. 들숨에 알코올, 날숨에도 알코올. 낮은 도수로 적은 양으로. 토닥토닥, 토닥여주는 술이다. 곁들이는 음식이 과하든 과하지 않든 제 고집부리지 않으면서 제 뜻은 전하는 그런 술, 이다.




이 모든 주절거림을 한 줄로 요약하자면 하다 하다 술을 구독하기 시작했고, 그 선택, 옳았다. 그리고 아직 두 병 남았다, 다음 달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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