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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다녀갔다. 그녀가 들려 보낸 음식들을 가져다 두기 위해 그는 점심시간을 쪼개어 엘리베이터 없는 5층 건물의 5층을 올라와 냉장고에 음식을 넣어두고 돌아갔다. 처음에는 그녀와 그에게 '내 집' 비밀번호를 알려주는 게 영 마뜩잖았지만, 나도 그녀와 그가 사는 집의 비밀번호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등가 교환하는 셈 치고 알려주었다. 사실 음식 같은 것, 냉장고에 채워주지 않아도 좋았지만 그녀가 그렇게 하고 싶다고 했기 때문에 그녀가 내 비좁은 냉장고에 음식을 채우는 것을 바라만 보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어떡 허든 '음쓰'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의무감에 고기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이번에 그녀가 보내온 돼지불고기는 기꺼웠다. 곁들여 마실 술이 있었으니까.
보리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 이름도 예쁘고, 보리밥의 식감도 애정하고, 맥주도 좋아하기 때문에 보리로 만든 모리에 대한 기대는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모리와의 첫 만남은 진도 백주를 떠올리게 해 주었다. 진도하면 홍주지만 곱디 고운 붉은빛을 내는 지초가 없어 백주를 만들었다고 하셨다, 진도 홍주 명인께서. 맑고 영롱한 붉은빛의 홍주와 달리 백주는 안개 같았는데, 향은 뭐랄까, 하필이면 초밥 속 고추냉이를 정곡으로 찔렀을 때처럼 '코 찡긋'하게 되는 향이었는데 그보다는 약하지만 모리도 그런 향이 났다. 모리는 19도지만 40도쯤 된다는 듯 짙은 향을 내었는데 그 허세가 무척 귀여웠다. 그 귀여운 맛에 쪼롭쪼롭 마시다 보니 어느새 빈 병, 투명해진 유리병 차암 예쁘다고 생각하며 잔을 거뒀다. 그리고 메이커스 마크를 땄다지. 후후훗.
모리를 마시면서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전통주 패키지 디자인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맛이야 지극히 주관적이고 호불호가 미친년 널 뛰듯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지만 '일단 한 번 만나봐'라고 말해주고 싶은데, 그러자니 외양은 무조건 호감이어야 하니까. 모리처럼 예쁜 병이라면, 심지어 분리수거를 위해 꼬박 하루 이틀 물에 불려 스티커를 떼지 않아도 되는 모리처럼 깔끔한 병이라면, 기꺼이 호불호 테스트에 임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뭐, 그렇다고 '까리하게' 디자인할 자신이 있는 건 아니지만 많고 많은 디자이너 중에 술을 깊이 애정하는 사람 하나 있을 테고, 그 사람이 '까리하게' 옷을 입혀주면 술들은 술술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흘러들지 않겠느냔 말이다. 하아... 고양이 두 개가 자꾸 퍼덕이며 뛰어다니고, 그 바람에 행여 술 쏟을까 조바심이 나 글쓰기에 집중할 수가 없다. 그러니 오늘은 여기까지.
덧.
유야무야 사라질 뻔한 양춘. 우리 집 막내 고양이 춘분과 절친이 될 것만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드는 삼양춘. 오향주 마시고서 아쉬운 마음에 성급히 딴 것이었는데 기대 이상이었다. 탁주란 자고로 사이다 타 마시는 것, 심부름으로 양은 주전자에 받아 오는 길에 홀짝홀짝 마시고 애미 애비 몰라봐야 하는 것이라는 편견을 싹, 깨끗하게 티끌 하나 없이 지워버린 양춘. 라벨만 좀 떼기 쉬운 걸로 붙여주었으면 참말 좋겠네. 아무 가게나 들어가도 살 수 있으면 더 좋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