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Aa Writer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정 Oct 20. 2021

초밥과 함께 소주를 마시다

Aa Writer

모처럼 외식을 하고 싶었다. 모처럼 조금 한가한 하루였고, 오랜만에 딴청을 조금 피웠기 때문에 퇴근 15분 전부터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동료가 나누어 준 쿠키를 먹었는데도 퇴근 시간이 가까워오자 배가 고파서 정성을 다해 저녁 메뉴를 고민했다. 후보는 3곳. 1번은 버스에서 내려 횡단보도를 건너자마자 있는 빈대떡 가게. 포장 손님이 대부분이라 홀에서 한 잔 하더라도 부담이 없을 것 같았다. 2번은 집까지 걸어가는 길에 있는 덮밥 가게. 바 테이블이라 손님이 많지 않으면 호젓하게 한 잔 마실 수 있는 곳이다. 3번은 시장 끄트머리에 있는 순댓국 가게. 근방에서 가장 맛있는 순대와 머리 고기를 팔고, 국물이 맑고 진하고 적당히 칼칼한 것이 소주 한 병? 훗, 두 병도 마실 수 있는 가게다.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고민하다가 프랜차이즈 초밥집에 갔다. 1번은 홀 손님이 없어도 너무 없어서 부담스러웠고, 2번은 어쩐지 먹고 나면 지나치게 배부를 것 같아 구미가 당기지 않았고, 3번은 중년 남자들이 많이 찾는 곳이라 혼술은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후보에도 없던 프랜차이즈 초밥집이 당첨.

미니 사시미와 소고기 초밥 다섯 점, 오리지널 참이슬 -무려 '오리지널'이 메뉴판에 떡하니 있다니!- 을 주문하고 나니 옆 테이블에 앉은 커플이 황급히 사케와 미니 사시미를 추가했다. 주문이 들어가면 기본 안주와 술부터 내주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물병이 나오고, 양배추 샐러드가 나오고, 뚝배기 우동이 나올 때까지도 술을 내주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술부터 달라고 할 수밖에 없었는데, 옆 테이블 커플이 흠칫 놀라는 것 같아 조금 수줍어졌다. 

소고기 초밥과 서비스로 내어 준 김말이 초밥이 가장 늦게 나와서 함께 찍히지 못했다.

수줍은 한 잔 술에 씻어내고, 온전히 나만의 시간. 사실 가게에서 혼자 술을 마시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솔직히 맥주, 위스키, 칵테일 등 서양 술은 혼자서도 곧잘 마셨지만 소주를 혼자 마신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쓰고 보니 부끄럽다. 회 한 점, 연어 머리 구이 한 점, 소고기 초밥 한 점의 맛들이 오롯이 전해졌다. 고추냉이를 너무 많이 넣어 '코-찡'을 몇 번 맞닥뜨렸지만 혼술에 방해가 되기는커녕 분위기를 북돋아 주었다. 조금 기분이 좋아졌다.

나를 돌본다는 것, 나 아닌 다른 존재를 돌본다는 것에 지쳐 있었다. 화가 많이 나 있었고, 너무 화가 난 나머지 계속 '하.하.하' 웃었는데 화가 나서 '하.하.하' 웃고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나뿐이어서 더 화가 났다. 화가 나면 이 불길의 방향부터 고민하는 인간인지라, 고민하는 사이 불은 사방으로 번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낯선 듯 낯설지 않은 프랜차이즈 초밥집에서 무려 오리지널 한 병을 차근차근 홀짝이는 동안 불길이 잡혔다. 그러니까 오늘의 한 잔은 주방에 난 불에 물을 뿌리다가 '오, 마이, 세이프티'를 외치곤 K급 소화기를 분사한 것과 같은 효과였다. 'K급'이라고 하니 뭔가 대단한 '급'인 것 같지만 그저 Kitchen'의 'K'일뿐, 화재마다 적합한 소화기가 다르다는 것뿐, 그러니까 불 난 데 부채질이 아니라 물을 끼얹은 것뿐. 한껏 기분이 좋아져서 싸늘한 바람이 선선하게 느껴졌고 보일 듯 말 듯 뜀뛰기를 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집은 고양이 똥밭이었다. 여기가 바로 이승이구나, 싶었다. 고양이 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더니 과연 그러했다.

그래서 술이 깨기 전에 이 글을 쓴다. 술이 깨고 나면 언제 다시 이승이 싫어질지 모르고, 방향을 잃은 불길이 날뛸지 모른다. 그러니 그때까지는 계속 평온하기로 한다. 오, 마이, 파이어 익스팅귀셔(Oh, my, fire extinguisher). 알코올로 불을 끈다고 하면 이과생은 분노하겠지만 문과생은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그렇게 또 하루가, 간신히, 지나가고 있다.



덧.

왜 때문에 '혼술' 키워드가 없는 것인가, 브런치! 이 매거진을 뽑아주지 않는 이유가 그것 때문인가, 브런치!

매거진의 이전글 만월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