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E.V.E.]
결전의 날, 창고에는 묘한 긴장이 감돌았다. 마을의 천막들은 바람이 스치자 미세하게 흔들렸고, 고요 속에서 그 마찰음이 길게 이어졌다. 세렌은 낡은 단말기 앞에 앉아 있었다. 화면에서 흘러나오는 푸른빛이 그녀의 얼굴을 반쯤 감싸고 있었다.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며 얼굴 위에서 일렁였다. 그녀는 손끝으로 케이블을 만지작거리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비가 안 오네요. AI가 국가를 좌지우지하는 시대에도 일기예보는 틀리다니.”
긴장을 풀려던 말이었지만, 에녹은 팔짱을 낀 채 미동도 없었다. 표정은 담담했지만, 손등에 힘이 서려 있었다. 고요함을 지키려는 사람의 침묵, 혹은 무너지지 않으려는 사람의 침묵. 세렌은 그의 옆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코드의 흐름이 일정한 리듬을 이루며 흘러가고 있었다. 그 패턴이 낯설지 않았다. 반년 전, 리오를 찾기 위해 중앙 서버실을 뒤지던 밤에도 저런 리듬의 파동이 있었다. 그때의 빛은 잃어버린 사람 하나를 붙잡기 위한 희망이었다면, 지금의 빛은 스스로 잃은 세계를 뒤집기 위한 결의였다. 창고 문이 스르륵 열리며 찬 공기가 스며들었다. 리오였다. 눈가에는 밤새 뜬 눈으로 버틴 사람이 가진 피로가 얇게 드리워져 있었다.
“마을은 조용해. 다들 잠들었어.”
“좋아.” 세렌이 짧게 말했다. “지금만큼은 집중해야 하니까.”
리오는 작게 숨을 들이켰다.
“이렇게 평화로워 보이는데, 우리가 곧 이걸 흔들어야 한다는 게… 조금 이상하긴 해.”
“흔드는 게 아니라,” 그녀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차분히 말했다, “제자리로 돌리는 거지.”
창고 안의 공기는 점점 뜨거워졌다. 노트북의 열이 바닥의 먼지 냄새와 섞여 공기를 달궜다. 에녹의 손끝이 키보드 위에서 미세하게 떨렸다. 세렌이 고개를 들었다.
“… 그렇게 이브가 무서우세요?”
“무서워하기엔, 너무 오래 함께 있었지.” 에녹의 낮은말.
“다만… 다시 한번 영웅인지 악당인지 모르는 갈림길에 서 있다는 감각은, 익숙해도 편하진 않네.”
세렌은 잠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단말기를 향해 시선을 정확히 고정했다.
이브의 백업 루프까지 남은 시간, 2분 13초.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 리오가 속삭였다.
대답은 없었다. 그 순간부터는, 숨소리조차 낭비였다. 이제 세 사람은 동시에 단말기 화면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이브의 보안 계층이 한 꺼풀씩 벗겨질 때마다, 화면 오른편의 게이지가 물결처럼 미세하게 흔들렸다.
“이브의 루프가 곧 닫힐 거야.” 에녹의 목소리는 거의 숨결에 가까웠다.
“알아요.” 세렌이 낮게 응답했다. “7초면 충분해요.”
시간이 뭉개져 흘렀다. 단말기 시계가 11시 59분 59초를 가리킨 순간, 공기 전체가 정적에 잠겼다. 세렌은 마치 폐 속의 산소까지 멈춘 듯 숨을 들이켰다.
“백업 루프 진입. 지금이야.”
에녹이 키를 누르는 순간, 세렌의 손도 정확히 그와 겹쳐 움직였다. 코드가 흐르고, 화면이 번쩍였다. 전체 네트워크가 일시적으로 ‘숨을 멈춘’ 듯 조용해졌다. 단 7초. 그 짧은 틈이었다.
“데이터 전송 시작.”
세렌의 목소리는 평온한데, 손가락은 이미 떨리고 있었다. 화면 중앙에 작고 맑은 문장이 떠올랐다.
[데이터 업로드 중…]
1초.
더스트 주민들의 행동 데이터가 방울처럼 흘러 들어갔다. 이브는 거부하지 않았다. 농사, 돌봄, 아이를 안는 자세, 손을 흔드는 아주 사소한 행동들까지, 마치 ‘보려고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흡수했다.
3초.
모든 게 예상보다 매끄러웠다. 침묵은 숨 막힐 만큼 평화로웠지만, 그 평온 자체가 불길했다. 화면에 손을 올린 세렌의 손끝에 식은땀이 맺혔다. 리오는 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떼지 않았다. 에녹은 고개를 들지도 못한 채 게이지만 주시했다. 그때, 화면이 흔들렸다. 미세한 굉음이 단말기 내부에서 낮게 진동했다. 게이지가 거꾸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에녹의 숨이 멎었다.
“피드백이… 역으로 들어오고 있어.”
5초.
붉은 경고가 화면을 뒤덮었다.
[비인가 피드백 감지 — UNAUTHORIZED FEEDBACK DETECTED]
[보안 루프 재가동]
리오의 손이 전원으로 올라가는 순간—
“아직 멈추면 안 돼!” 세렌이 비명을 토했다.
그들의 외침 위로, 전류가 소리를 내며 피어올랐다. 단순한 전기 진동이 아니라, 기계가 고통을 느끼는 울음처럼.
6초.
“더 질질 끌면 끝장이야!” 리오가 소리쳤다.
“조금만 더—!” 세렌도 포기하지 않았다. 다만, 목소리가 이미 흔들렸다.
그리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단말기에서 파직, 불꽃이 튀었다. 전력선이 타들어가며 창고 전체가 동시에 꺼졌다. 순간의 섬광 후에 세상의 전원이 스위치처럼 찌익 하고 끊겼다.
눈으로 밀려들어오는 어둠 속에서 리오는 빛 대신 본능을 향해 움직였다. 몸을 던지듯 창고 밖으로 나가 메인 전력선을 붙잡은 그의 손끝은 스파크에 타들어가는 냄새가 났다. 하지만 그는 주저하지 않고 메인 전원을 뽑아버렸다. 세상이 완전한 침묵으로 가라앉았다.
쾅. 무언가를 부수는 소리가 어둠에서 터졌다. 에녹이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친 것이다. 세렌은 손끝이 지독하게 떨리는 것을 느끼며, 그것이 두려움인지, 실패인지, 확신인지, 단정할 수 없었다. 리오는 벽에 등을 댄 채, 숨을 뜯어먹듯 몰아쉬었다. 마치 방금, 살아 돌아왔다는 사실을 믿지 못한 사람처럼.
“끝났어요?” 그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에녹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멈췄네.”
“무슨 차이죠?”
“흔적이 남았다는 뜻이지. 예상치 못한 급정거는 바퀴 자국을 남기는 법이니까.”
세렌은 화면을 응시했다. 꺼진 화면에 그녀의 얼굴이 희미하게 비쳤다. 그 눈동자 속엔 실패의 공포보다도 깊은 무언가가 있었다. 세렌은 문을 열고 나섰다. 어느새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옷이 젖는 것도 모른 채, 한참 동안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돌아서며 말했다.
“이브가 알았을까요. 우리가 접근을 시도했다는 걸.”
에녹은 잠시 말이 없었다가, 조용히 대답했다.
“아마도.”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멀리서 희미한 진동이 들렸다. 지하 전력선의 잔류전류가 스스로 재가동되는 소리였다. 에녹은 얼굴을 굳혔다.
“완전히 끊기지 않았어. 역신호가 돌아간 거야.”
“그럼…”
“우리를 추적하겠지.”
틈이라 믿었던 그 경로는, 들어가는 길이 아니라 곧바로 떨어지는 낭떠러지였다. 마을에는 더 이상 설명할 수 없는 정적만 남은 채,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다음날, 마을은 시끌벅적했다. 전등도, 냉장고도, 전기를 쓰는 그 무엇도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물론 어제 결전을 벌인 창고의 전선들도 아무런 온기 없이 죽어 있었다. 주민들이 밖으로 뛰어나와 너도나도 리오를 찾았다.
“아마 노후 배선 탓이겠죠. 고쳐볼게요”
리오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표정은 굳어 있었다. 에녹과 세렌은 몰래 창고 옆으로 가서 전력선을 살폈다. 그는 손끝으로 굵은 케이블을 짚으며 낮게 중얼거렸다.
“우리가 너무 깊이 찔렀나 보군.”
세렌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어젯밤처럼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낮인데도 이상하게 어두웠다. 마치 무언가가 태양을 가린 듯. 그날 하루는 그렇게 흘러갔다. 전기가 돌아오지 않은 채, 저녁이 오고 밤이 왔다. 사람들은 거리에 모닥불을 피우고, 옛날이야기처럼 어둠을 견뎠다. 아이들은 신기해했고, 어른들은 불안해했다. 누구도 말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이게 단순한 고장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이 사건의 원흉인 세 사람은 낮에는 주민들과 함께 전력을 복구하려, 밤에는 이브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하려 쉼 없이 머리를 굴렸으나, 양쪽 모두 해결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닷새가 지나자 결국 주민들은 전력 복구를 포기한 채 라디오를 붙들고, 정부에서 이 상황을 인지하고 최소한의 전기를 돌려주기만 빌고 또 빌었다. 세 사람도 라디오를 붙잡고 있긴 마찬가지였으나, 그들은 주민들과는 반대로 라디오에서 이곳에 대한 그 어떤 이야기도 나오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라디오는 그들의 속이 타들어가는 만큼이나 자주 치지직 거리기만 했다.
그렇게 정전사태가 일어난 지 일주일 하고도 이틀이 지난날, 라디오에서 마침내 선명한 목소리가 들렸다. 세렌 일행을 비롯한 주민들은 재빨리 그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귀를 기울였다. 스피커 속에서 갈라지는 잡음 사이로 차가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최근 56 구역을 기점으로 발생한 대규모 정전 사태는 비공식 구역에서 시도한 이브의 비인가 접근을 방어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국가 보안국은 이를 불법 데이터 침입으로 규정하였으며, 즉각 조치를 취할 것입니다. 특히 해당 구역은 과거 전과자 및 추방자 비율이 높아 반체제 세력의 개입 가능성이 있으므로—”
라디오가 끊겼다. 잠시 침묵. 그리고 다시 목소리가 이어졌다.
“정부는 이를 ‘무기록자의 테러 시도’로 판단합니다.”
그 한 문장에 마을이 들썩였다. 사람들은 얼굴을 마주 보며 숨을 삼켰다.
“56구역 근처 더스트라면 우리 밖에 없는데… 이거 설마 우리 얘기야?”
누군가 물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또 다른 사람이 소리쳤다.
“에이, 설마. 우리 중에 그런 미친 짓을 할 사람이 어딨어? 보나 마나 질 나쁜 무리들이 벌인 짓이겠지.”
“그렇지만 이곳 외에는 전기가 들어오는 곳이 없는걸.”
사람들의 시선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세렌은 침묵했다. 그녀의 손끝이 떨렸다. 리오가 옆에서 라디오를 꺼버렸다. 에녹은 고개를 숙였다.
“저쪽에서 먼저 해결책을 찾았군.”
다음날부터 더스트의 공기에 기계의 날카로운 냄새가 섞여 들어오기 시작했다. 멀리서 들리던 드론의 윙윙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이내 하늘 위로 붉은 점들이 떠올랐다. 감시 드론이었다. 잠시 후, 드론이 공중에 스크린을 띄우며, 하늘이 파랗게 물들었다.
[보안조사 대상자: 이브 등록 말소 전과자]
단 한 줄의 문장이었다. 그러나 그 문장 하나로 모든 것이 끝났다. 사람들은 숨어들었다. 누군가는 짐을 싸고, 누군가는 아이를 감싸 안았다.
“또 시작이야...” 누군가 울먹였다.
“다시는 이브에 시달리고 싶지 않았는데.”
그 후, 이브는 무서운 기세로 제3 더스트에 밀고 들어왔다. 별뿐이던 밤하늘에는 드론이 떠다녔고, 마을 입구는 군용 차량이 막았다. 화목하던 마을 회관에는 무장을 한 감시관들이 진을 쳤다. 붉은 조명이 그들의 무표정한 얼굴을 비추었다. 리오가 이를 악물었다.
“노약자밖에 없는 곳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 총까지 가져오다니.”
그는 한 발짝 앞으로 나서려 했지만, 세렌이 그의 팔을 잡았다.
“안 돼.”
“놔. 저것들이 마을을 헤집는 걸 두고 보라고?”
리오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세렌은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일단 살아남아야 바꿀 수 있어. 그리고 네가 나서면 루미도 위험해.”
리오는 루미의 이름이 나오자 마지못해 물러섰다. 하지만 그의 눈빛엔 여전한 분노와 두려움이 보였다. 아니, 주민들 대부분의 눈빛이 그랬다. 감시관들은 결의에 찬 그들이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치고는, 주민들을 한 줄로 세웠다. 그리고 한 명씩 얼굴과 지문을 스캔하며 데이터 확인을 시작했다.
“등록 말소. 전과자. 확인.” 전자음이 반복되었다.
사람들의 숨소리가 점점 빨라지는 가운데, 한편에서는 감시관들이 전과자였던 어머니와 어린아이를 떨어뜨리려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억지로 잡아당겨진 아이가 결국 울음을 터뜨리자, 감시관들 중 덩치가 큰 남자가 아이를 한 손으로 들어 입을 막았다. 리오는 그 광경을 보며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세렌도 반사적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나섰으나, 이번엔 에녹의 손이 그녀의 팔을 거세게 붙잡았다.
“참게.”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 이목을 끌어서 좋을 게 없다는 걸 알잖나. 어차피 저들에겐 혐의점이 하나도 없으니 금방 풀려날 거야. 우선은 숨죽이고 있는 게 대의를 위하는 길이라네.”
그의 눈빛은 차가웠지만, 그 안에는 오래된 슬픔이 깃들어 있었다. 세렌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대의. 우리의 대의는 무엇일까. 한 나라를 해방으로 이끈 간디의 그것일까, 아니면 개혁이란 명분으로 나라 전체를 뒤흔든 히틀러의 그것일까. 내가 지금 하는 일은 더스트의 주민들에게 사람답게 살 수 있는 희망을 주는 것일까, 아니면 비참하더라도 평화로웠던 그들의 일상을 무너뜨리는 일일까. 이게 바로 에녹이 말했던 영웅과 악당의 갈림길이라는 걸까.
세렌은 귀를 찢는 듯한 감시관의 전자음에 정신을 번쩍 차렸다. 다시 고개를 들자, 리오가 루미를 꽉 끌어안고 있었다. 루미는 불안으로 굳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떨리는 그의 손 위에 자신의 작은 손을 꼭 포갰다. 잠시 생각에 빠졌을 뿐인데, 조금 전까지 이곳을 지탱하던 결연한 눈빛들은 모두 사라져 있었다. 지금의 더스트에는 포박당한 채 무릎을 꿇은 사람들, 울부짖는 어른들, 절망에 질린 아이들만이 남아 있었다.
그 광경 속에서 세렌은 단 하나의 사실만을 선명히 붙잡았다.
'나의 대의가 어떤 색을 띠든, 지금 마주한 이 악만은 명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