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플스에 손을 대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그렇다고 현생을 열심히 살았냐고 한다면 그것도 아니다.
사건의 발단은 오리진에서 심즈4를 무료로 배포하면서부터 시작됐다. 아니 더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 아버지가 나에게 심즈1 올확팩을 컴퓨터에 직접 깔아주면서 이 사단이 나게 됐다. 그때까지 게임이라고는 마리오나 철권 마냥 격투·슈팅·액션만 있는 줄 알았던 나에게 시뮬레이션은 그야말로 세로운 세계였다. 게다가 컴퓨터 안에서 몇백 번씩 옷을 갈아입히고 집도 사고 직장도 보내고...고급진 랜선 소꿉놀이가 눈앞에 펼쳐지는 느낌이었다. 3D로 구현된 심즈 2는 더 충격이었다. 오픈월드가 구현된 심즈3은 혁명이었다. 그러나 빠른 게임 산업의 발전과는 달리 우리집 PC의 발전은 심즈3의 그래픽 사양을 따라가지 못해 먹통이 되기 일쑤였고 결국 눈물을 머금은 채 심즈4의 플레이는 무한정 미뤄둘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심즈4는 심즈3에 비해 훨씬 저사양에서도 구동이 가능하다는 게 아닌가. 오류가 심했던 오픈월드 시스템을 버린 것이 큰 원인이 아닐까 한다.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무료배포되고 있던 심즈4 오리지널을 다운받게 되었고 이럴수가 놀랍게도 나의 그램 노트북은 씩씩하게 심즈4를 작동시키기 시작했다. 불평은 없었지만 살짝 화상을 입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한 어마무시한 발열을 보여줘서 쿨러도 샀다. 심즈 시리즈는 원래 오리지널 이외의 확장팩을 통해 재미를 넓혀가는 게임이니 만큼 확장팩 한두 개도 구매했다. 심즈4에 이르러서부터는 직장생활, 도시생활 등 굵직한 플레이와 컨텐츠를 보유한 확장팩과 소소한 게임 요소를 추가할 수 있는 게임팩, 외형이나 가구 등을 포함한 아이템팩으로 게임 컨텐츠를 분자단위로 쪼개 팔아먹는 만행을 저지르고 있어 결국 눈물을 머금고 약 30만원을 들여 (할인 기간에) 거의 모든 확장팩을 구매한 상황이다. 플스 타이틀 한 개에 소모하는 금액으로 비교하면 어마무시하다.
그러나 벌써 493시간을 찍어버린 나로서는 비난할 수는 없게 됐다. 아쉬운 점이라면 심즈4 플레이 중에 다른 게임을 잘 접하지 못했다는 것 정도일까. 예전에는 주로 심을 선택에 직장에서 계속적으로 승진하고 돈을 왕창 버는 것을 목표로 했다면 올해의 493시간 중에서 300시간 정도는 집 짓기에 투자했다.
심즈 4는 이전 시리즈에 비해 건축이 상당히 쉬워졌다. 더불어 심즈2 시절에는 주로 다음이나 네이버 카페를 통해서 유저들의 팁을 얻었지만 이제는 해외 유투버들의 집짓기를 구경하면서 이것저것 따라해보는 재미가 쏠쏠해졌다. 건축이나 인테리어를 직업으로 했어도 좋았겠다는 생각을 함과 동시에 아무리 해봐도 수준 높은 유투버들의 센스와 묘하게 다른 나의 감각을 보니 역시 그런 건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도 하고 그랬더랬다.
심즈는 왜 재밌나? 중3때부터 스스로에게 질문해봤지만 아직도 명확한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답을 알면 이 짓을 그만할 수도 있을 텐데... 내 맘대로 집 수십 채를 짓고 인테리어를 매일 바꾸고, 원하는 직업을 선택하고, 귀찮으면 일을 안해도 되고, 돈이 많으면 많은 대로 적으면 적은 대로 플레이에 즐거움이 있다는 것은 확실히 장점이다. 이러다 보면 300시간이 훌쩍 간다. 더불어 수영장과 헬스클럽, 공원, 도서관 등 각종 공공시설은 다 무료다. 밥값만은 칼같이 가져가지만 이것도 요령 있게 충당이 가능하다. 완벽한 공산주의적 유토피아 속에서 자본주의적 자유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일까? 아니 이건 너무 나간 것 같다.
심즈는 심들의 인생을 플레이한다. 뭐든지 할 수 있는데, 그 '뭐든지'가 다 즐겁다. 즐거운 원인은 여러 가지일 수 있다. 현생과 다르게 노력한 만큼, 혹은 그 이상의 리워드가 보장되기 때문일 수 있다. 게임이라는 안전 장치 속에서의 활동이기 때문에 위험 부담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다. 실수해도 언제든 되돌릴 수 있고, 또 되돌리지 않아도 괜찮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한마디로 인생에서 마주쳤을 때 조금은 껄끄러울 장애물들이 심즈 속에서는 없다.
현생이 그렇지 않기 때문에 심즈를 한다, 고 하면 너무 슬픈 자기비하다. 다만 때로 우리는 우리의 순간이 너무 소중하기 때문에 오히려 망설인다. 오랜만에 얻은 짧은 휴가는 마음을 설레게 하지만 끝나고 난 뒤의 아쉬움을 생각하면 복잡한 기분이 든다. 사과나 감사를 전할 때는 어떤 기프티콘을 보낼지, 전화를 먼저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시간을 잡아먹는다. 하다못해 저녁에 뭘 먹어야 하는지조차 잘못 선택하면 실망하기 마련이다. 우리의 하루하루를 채우는 선택과 경험들의 가치를 알고 있기 때문에 결정은 어렵고 망설여지는 것이다. 때문에 내가 한 번씩 더 좋은 결정들을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크게 좌절할 필요는 없다. 삶은 완벽한 재료들을 갖춰야 완성되는 요리라기보다는 매일매일이 한땀씩 모여 이뤄지는 뜨개질 같은 것이니까.
그러므로 심즈를 하고 계시는 여러분들은 누구보다 일상이 주는 축복을 잘 안다고 할 수 있겠다. 심즈에서는 누구도 당신에게 '그건 잘못된 선택이야'라고 말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가장 큰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는 것은 나 자신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심즈를 하는 당신은 당신 자신에게 그런 비난을 가하지 않을 테다. 부디 우리 모두 현생에서도 그렇게 될 수 있기를 바라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