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한살
아르바이트로 돈을 꼬깃꼬깃 모아, 드디어 몽골을 가는 날이 되었다.
물론 학교 다니면서 돈을 모두 마련하지 못했다.
부모님께 부탁도 했고 교회 사람들에게 지원도 어느 정도 받았었다.
내 꿈인 승무원들이 가득한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지나다니는 승무원들을 쳐다볼 시간도 없이, 분주하고 복잡한 공항.
나는 나와 함께 가는 팀을 만나기 위한 구역으로 발걸음을 뗐다.
서둘러 온 탓에 우리 팀은 모두 카운터 앞에서 비행기 티켓을 끊기 위해 기다렸다.
그 사이에, 나는 서둘러 언니에게 전화를 했다.
부모님도 아닌 언니에게 전화를 한 이유는 언니가 수술하는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언니는 이 시점으로부터 일 년 전, 교통사고로 크게 다쳤다.
그때 다리에 철심을 박아야만 했는데 오늘은 재수술을 통해 철심을 제거하는 날이었다.
무거운 마음으로 전화를 걸었지만,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건 언니의 원망 섞인 목소리였다.
'언니, 수술 잘하고 와.'
'야, 착한 척하지 말고 거기나 다녀와. 뜬금없이 걱정하는 척이야.'
내가 부모님의 돈을 받아 몽골에 가는 게 언니에게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언니가 수술하는 날, 곁을 지키지 않고 가는 게 섭섭한 마음이 들었을 거라 생각한다.
언니와 전화를 마친 후, 눈물이 볼을 타고 주르륵 흘렀고 때마침 우리가 수속할 타이밍이 되었다.
덕분에 눈물은 금세 멈추고 설레는 마음으로 급변하기 시작했다.
사람의 마음이란 참 알 수 없는 노릇이다.
ㅡ
사실 공항에 도착한 순간부터 비행기가 출발하는 순간까지 설렘은 극에 달하지 않던가.
나는 수속을 하며 티켓을 받는 순간, 몇몇이 모여 비행기 티켓 사진을 찍는 순간,
보안 수속을 마치고 탑승 게이트를 찾아가는 순간, 그리고 비행기를 탑승하던 순간까지 잊을 수가 없다.
내가 일하기를 꿈꾸던 그 비행기라는 공간에서
멋진 승무원들이 승객들에게 안전 관련 사항들을 요청하는 걸 보니
마치 연예인을 본 것 마냥 심장이 쿵쾅대기 시작했다.
띵-띵-띵-
비행기가 곧 이륙하겠다는 신호가 나왔고
나는 천국에 가지 않았지만, 이미 천국에 간 것과 같은 기분을 느꼈다.
매일 이 느낌을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는 희망과 함께 눈을 꼭- 감고 이륙하는 느낌을 즐겼다.
이륙 후에는 음료 서비스가 시작되었다.
저 멀리서 오는 카트를 보고 미어캣처럼 고개를 삐쭉 내밀고는 옆자리 친구에게 뭘 마실 건지 물었다.
'야, 너 뭐 마실 거야?'
'너는?'
'나 지금 콜라랑 오렌지 주스 중에서 고민 중이야! 뭐 마시지?'
'난 오렌지 주스!'
'나도 그냥 오렌지 주스 할래!'
오렌지 주스로 결정을 마쳤지만, 카트가 나에게로 가까이 다가오자 영어 공포증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스무살 필리핀 어학연수로 극복한 줄로만 알았던 영어 공포증은,
옆에 영어를 잘하는 동생, 친구, 언니가 있으니 좀처럼 입을 열고 싶지가 않았다.
외국인을 만나면 나오는 공포증이 아니라, 영어를 잘하는 한국인 때문에 나오는 공포증이라니 나 원참.
나는 속으로 '엄마가 이 모습을 보시면 필리핀 보낸 게 돈 아깝다고 생각할 거야!'라고 생각했다.
수만 번 입으로 '오렌지 주스 주세요!'라는 말을 되뇔 때쯤 카트가 도착했고,
내 마음을 알 턱이 없던 영어 잘하는 언니가 '오렌지 주스 2개랑 사이다 1개 주세요.'라고 말했다.
'미국 살다 왔다고 발음 참 다르네! 어디 가서 어학연수 다녀왔다고 하지 말아야지...'라는 비교의식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속으로 온갖 자존감을 스스로 갉아먹기 시작할 때 다행히도 내 부정적인 생각을 막아줄 기내식이 나왔다.
너 나 할 것 없이 똑같은 기내식을 먹고 우리는 도착할 때까지 잠을 청했다.
ㅡ
몽골에 가는 비행기는 특별하지 않았다.
내 예상에 빗나가는 법 없이 상상한 그대로의 모습이었으니까.
그런데 몽골 울란바토르에서 자브항으로 이동하는 국내선에서의 일이었다.
소형 비행기를 탑승했는데, 기류가 흔들릴 때마다 꼭 비상착륙하듯 공포심을 느껴야만 했다.
나는 겁에 잔뜩 질려, 이걸 내 미래의 직업으로 삼는 게 맞는가 아닌가를 수천번 고민했는데
내 옆에 앉은 몽골인이자 아기 엄마는 어쩜 그리 표정이 천하태평하던지 신기했다.
소형 비행기였지만 줄 건 다 줬었다.
이때도 마찬가지로 오렌지 주스를 먹었는데, 조금씩 마신다고 컵을 정리하지 못했다.
그런데 옆에 앉은 아기 엄마가 테이블 위에 아이를 올려놓고 기저귀를 갈더니,
그 기저귀를 내 종이컵에 넣는 것이다.
'아니 이게 무슨 상식 밖의 행동이야?' 싶어서 화를 내고 싶었지만 어차피 말도 안 통하지 않던가.
표정으로라도 얘기하려고 했는데, 내 얼굴을 보고 씩 웃는 그녀 앞에 나는 멋쩍은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선교를 하러 가는 길이었다.
선교하는 내내 어떤 시련과 고통이 주어져도 예쁜 마음을 먹어야 하는데, 벌써부터 시련이 주어지는구나 생각했다.
'좋았어, 첫 번째 시련은 가볍게 이겨냈다고 생각하자. 더 이상은 시련이 없었으면 좋겠는데...'
첫 번째 시련이 끝나자 몽골에 도착했고, 내 앞에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