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한살
스물한 살의 뜨거운 여름,
나는 교회에서 해외 선교활동으로 몽골에 가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몽골에 가기 위해서는 비행기값이 필요했다.
우선 인천에서 몽골로 가기 위한 국제선 비용과
몽골 울란바토르에서 자브항에 가기 위해 타야 하는 국내선 비용,
그리고 몽골에 있는 아이들에게 선교하기 위해 사용되는 수많은 금액들.
뿐만 아니라, 선교사님께 드려야 할 헌금까지.
나는 부모님께서 한 달에 용돈을 20만 원씩만 주셨기 때문에,
몽골에 가기 위해서는 20만 원 가지고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하기 시작했다.
ㅡ
평일에는 학교 앞에 있던 옥루몽이라는 빙수집에서 일했고
토요일에는 전단지 아르바이트와 같은 일일 알바로 몸을 때웠으며
일요일에는 선교 준비에 한창인 나날들을 보냈다.
옥루몽은 사장님은 계시지 않았다.
그래서 남자 아르바이트생과 나, 이렇게 둘이서 함께 일했다.
남자 아르바이트생은 두 명이 번갈아 가면서 일했고 나 혼자만 매일 일했던 걸로 기억한다.
남자가 더 집안일에 관심 없어서 일 못할 법도 한데, 두 놈은 어찌 된 일인지 깔쌈하게 일을 했다.
덕분에 나는 대조적으로 못해서 이 두 놈에게 매번 혼쭐이 났다.
어쩌면 대조적으로 못하는 게 아니라, 진짜 못했던 걸 수도 있다.
‘야! 너 집에서 집안일 하나도 안 하지!’
‘아니거든요! 하거든요?!!’
사실 자취하기 전까지는 잘 안 했다.
올려진 물건을 제자리에 놓는 것 외에는.
그런 게 남에게는 기가 막히게 티가 나나보다 하고 놀랐던 순간이었다.
그래도 인간은 환경에 적응하는 동물 아니던가.
하다 보니 빙수를 예쁘게 담는 실력, 깔끔하게 매장을 정리하는 능력 모두를 갖추게 되었다.
제로 베이스로 시작한 나의 아르바이트 스킬이 한층 성장하는 시간이었다.
손님을 응대하다 보면 별의별 시비를 거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죄송하다는 말 한마디면 그만이었다.
어느 날은 아르바이트를 함께하는 오빠들이 회식하러 가자고 하여 셋이서 술을 마셨다.
원래 술을 마시지 않아서 술을 잘 마시지도 못하는데 술을 먹으려니 고역이었다.
마시지 않았으면 되지 않았냐고?
오빠들을 업무 외적으로는 잘 알지도 못하고 셋이서 먹는 건데, 사회생활이라면 분위기는 맞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먹고 죽자!’라는 한 오빠의 말에
‘그래 죽자!‘라고 화답했지만, 내 주량은 맥주 한 캔.
‘너 팝핀 추냐?! 뭘 그렇게 꺾어 마셔!’
‘먹고 죽자! 맥주 한 캔!인 애는 너밖에 없을 거다.’
라는 말들을 들었다.
당시에 저 말들이 너무 웃겨서 깔깔대고 웃다가 집에 온 기억이 있다.
억지로 마신 것도 아니었고, 억지로 먹게 만들지도 않았기에 내게는 재미난 추억이다.
ㅡ
일일 알바를 하는 날에는 전단지를 주로 돌렸다.
한 번은 친구와 함께 이불 가게에서 했는데,
이불에 사용되는 충전제가 양털이라서
양털 옷과 탈을 쓰고 전단지를 돌려야 하는 것이다.
‘여름인데 이걸 어떻게 해요?’라는 질문은 할 수 없었다.
친구와 나, 둘 중 한 명만 착용하면 됐는데,
친구가 아르바이트하려고 멀리 우리 동네까지 온 거라 내가 그냥 하겠다고 했다.
탈을 써서 오히려 좋았던 건,
사람들에게 눈치 보지 않고 장난칠 수 있다는 거였다.
대자로 바닥에 누워 ‘가져가세요!’라고 외쳐보기도 하고 정지화면처럼 가만히 서있다가 옆에 사람이 지나가면 팔만 탁-하고 움직여 주기도 했다.
나의 행동이 재밌었던 초등학생들은 무리 지어 와서는 ‘저도 주세요!’하며 대폭 나의 전단지 양을 줄여주었다.
또 한 번은 함께 몽골을 가는 언니의 어머님으로 인해 시작한 전단지 아르바이트였다.
별 거 없었다.
그냥 전단지를 돌리면 되는 거였는데, 언니가 내가 돈이 없는 걸 알아서 부모님께 부탁한 듯 보였다.
당시에 눈치를 챘지만, 자존심 때문이었을까 혹은 나를 위해서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을까 모르는 척 전단지를 돌리고는 시급을 받았다.
ㅡ
글쎄, 다른 사람들의 아르바이트 경험은 들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내가 별나다고 생각하면 별나고
평범하지 않다면 평범하지 않은 아르바이트다.
내 기억에 특별했다면 특별한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본인만의 추억이 가장 특별한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