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살랑 Jun 05. 2022

이것도 산재예요?

일하다가 아파봤던 노동자라면 꼭 읽어봐야 할 책

산업재해보상보험, 줄여서 산재보험. 더 줄이면 산재. 이 책을 산 이유는 간단했다. 회사를 다니며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기 때문이다. '회사 때문에 아픈지도 모르고 일하는 당신에게'. 책 표지의 첫 문장과 다르게 나는 내 아픔들이 100% 회사 때문이라고 확신하는 사람이었다.   


입사 이후 2년이 안된 시점에 정확히 11kg가 빠진 건 확신의 시작이었다. 입사해 정신없이 일에 적응한 후엔 이미 입사 동기 중 절반은 사라진 상태였다. 알고 보니 회사는 이직한 경력자도 버거워할 만큼 업무량이 많은 편이었다. 물론 회사는 야근을 강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야근을 하지 않으면? 주별로 돌아가는 업무 사이클을 나는 절대 맞출 수 없었을 것이다. 

어떤 날은 화장실을 가지도 못할 정도로 일을 했다. 일에 치이다 보니 당연히 식욕이 줄었고 하루 한 끼 식사가 일상이 됐다. 물론 경도 비만에서 평균 체중으로 돌아오며 외모에 대한 자신감이나 만족도가 높아진 건 사실이다. 남자 친구는 내 얇아진 손목을 보라며 투정을 부릴 때마다 어이없어하며 '사실 좋은 거 다 안다'고 비아냥댔다. 하지만 오랜만에 만난 지인들은 짧은 시간 동안 달라진 내 모습에 조심스레 질문하곤 했다. "너, 어디 크게 아프니?"


두 번째는 불면증이었다. 내 인생의 몇 안 되는 자랑은 언제 어디서나 잠을 잘 잔다는 것이었다. 침대에 눕기만 하면 맘먹고 12시간은 잘 수 있었다. 수면의 질이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한 것은 입사 6개월 차가 넘어가던 시점부터였다. 중요한 일이 있으면 꿈속에서 그 일을 하느라 잔 것 같지가 않았다. 회사 생각에 새벽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고 자면서도 세 번 정도는 깨는 것이 이제는 일상이 됐다. 


이 책의 리뷰를 올리며  우려가 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웹서핑을 타다 타다 내 글을 발견한 회사 인사팀 직원이 내가 산재를 청구할 것이라 오해하고 나를 예의 주시할까 봐 겁이 났던 것이다. 오랜만에 사무실에 출근하는 날, 가방 안에 넣어두었던 이 책을 조심스레 가렸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문득 궁금해졌다. 산재는 어째서 그런 부정적인 이미지로 고착되어 버린 걸까. 산재를 떠올리면 임금체불이나 실업급여처럼 회사와 노동자가 서로 얼굴을 붉히는 데면데면한 상황이 자동으로 연상된다.


이 책을 읽으며 산재보험에 대한 나의 편견은 총 세 가지였다. ㅡ사실 책의 90% 정도가 기존에는 몰랐던 사실들이며 그중에서 인상 깊었던 편견을 세 가지로 추려본다.ㅡ


첫째, 여드름부터 코로나19까지 모두 산재가 될 수 있다.

우리가 뉴스에서 몸을 많이 쓰는 건설직 노동자나 배달기사의 산재 소식을 주로 접한다. 그들의 사례가 주로 높은 곳에서 떨어져 몸이 크게 다치거나, 과도한 업무로 과로사를 하는 등의 극단적인 케이스다 보니 우리는 우리가 산재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쉽게 생각하지 못한다. 산재는 나 같은 사무직 노동자에게도, 콜센터 상담사도, 편의점 노동자도 누구나 신청할 수 있다.


인정하는 병의 범위까지 다양하다. 나와 같은 불면증부터 우울증, 방광염과 손목 통증 등 일상적인 직업병까지 산재로 인정받을 수 있다.


둘째, 산재는 업무시간 중 사고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회의자료를 제본하다가 기계에 손이 찍혀야만 산재로 인정될까? 그렇지 않다. 산재는 업무상 사고뿐 아니라 업무상 질병, 출퇴근 재해에도 해당된다. 심지어 회사를 퇴직한 뒤에 병이 발생했어도 업무와 연관이 있다면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되며 반차를 쓰고 병원에 들렀다가 집에 가는 길에 교통사고가 났더라도 산재를 청구할 수 있다.


 셋째, 회사의 공상처리는 신중하게 고려하자.

산재 보험의 대상에 해당하는 데도 회사가 치료비를 내줄 테니 산재보상 신청을 하지 말라고 회유하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 산재보상 신청 대신에 회사가 치료비를 지급하는 것을 '공상처리'라고 하는데, 회사의 공상처리는 신중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 회사가 산재보상으로 받는 돈보다 훨씬 넉넉하게 공상처리를 해 준다고 해도 병원비와 일하지 못하는 기간의 휴업급여, 치료가 끝난 뒤에도 다시 아플 수 있는 상황을 대비한 재요양 신청처럼 산재보험 신청이 더 유리할 가능성이 크다.


무식하게 일했던 입사 초기보다는 확실히 회사와 나를 분리하고 무리한 업무 일정을 짜지 않도록 노력하는 편이다. 하지만 생전 없던 기립성 저혈압과 손떨림 증상까지 겪으며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는 아닌지 씁쓸해진다. 산재를 신청할 일이 생기기 전에 아플 일을 만들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회사에 대한 애사심과 열정은 없던 병을 만든다. 나는 그것을 너무 늦게 꺠달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멋있으면 다 언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