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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랑 Jul 18. 2020

피아노 치는 은행원

남사친 H


익숙한 이름 세글자가 액정에 가득찼다. 오늘 중요한 프로젝트를 성사시킨 기념으로 회식을 한다더니 또 혀가 잔뜩 꼬였겠군, 하고 생각했다. H가 내 이름을 부르면 나는 문득 아빠가 생각났다. 언젠가는 그것이 좀 이상해서 물었더니 역시나 H는 아빠의 고향 바로 옆 지역에 산 적이 있었다고 했다. 사투리가 약간 섞인 그의 말투,
친숙하고 정겨웠던 이유가 바로 이거였다.


한 시간여의 통화를 마치고, 문득 H를 생각한다. 그를 떠올리면 늘 추운 겨울이 생각난다. 겨울에만 만난건 아닌데 이상하게 그렇다. 대학생 때 그가 교복처럼 입던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겨자색 패딩과 그 옷을 입고 내가 탄 택시 번호판을 카메라로 찍던 스물 다섯의 그의 모습이 떠오른다.


큰 일에 휘말려 도움을 받기 위해 찾아간 그의 직장 근처에서 무표정으로 나를  한참 바라보다 밥부터 먹여야 한다며 밥집을 찾던 그때 역시 추운 겨울이다.


그를 안지 햇수로 5년이 되었다. 하지만 난 아직도 그를 잘 모르겠다. 그는 은행원이다. 매일 돈을 만지고 서류를 다룬다. 숫자 하나도 틀려서는 안 된다. 철저하며 의외로 원칙주의자다.


하지만 그는 국문과 출신이다. 퇴근하면 피아노를 치고 주말에는 시집을 들고 카페를 간다.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디저트 사진을 찍는 것은 최신 스마트폰으로 바꾸며 생긴 버릇이다.


늦은 퇴근길, 오늘도 전화기 너머로 그의 낮은 목소리가 들린다. 빵빵거리는 차들의 소리, 새벽이 주는 차갑지만 상쾌한 공기, 그리고 그의 고뇌와 인생이 들린다. 그럴 때마다 깨닫는다. 우린 정말 하나부터 맞는 것이 없다는 것을. 그의 감성과 나의 감성은 평행선처럼 영영 만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는 것을 말이다.


그를 안지 5년이나 되었지만, 난 아직도 그를 여전히 정말로 모르겠다. 하지만 알고싶다.
그를 알아야  그의 고뇌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서다. 그렇게 되면 조금이라도 그의 짐을 덜어줄 수 있지 않을까. 그가 늘 행복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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