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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랑 Oct 17. 2020

제주가 각자에게 주는 의미

#김금희 #복자에게 #북리뷰

태풍처럼 스스로를 들쑤셨던 스물 일곱, 제주를 가다


제주도에 간 것은 세 번 정도이다. 기억이 나지 않는 어렸을 때 한 번, 초등학교 수학여행으로 한 번, 그리고 재작년 혼자 떠난 여행이 그 나머지 한 번이다. 첫번째 여행은 남들에 비해 어릴 때의 기억이 비교적 생생한 내게도 가물가물 하기에 그냥 넘어가도록 하고 두번째 여행부터 언급하기로 한다.


수학여행으로 떠난 제주는 사실  유쾌하진 않았다. 여느 패키지 여행이 그러하듯 하루에 한 번은 꼭 기념품 가게를 들렀고 콘도는 형편 없었다. 자신을 흑돼지라 주장하지만 고추장 양념에 버무려져 칠레산 돼지고기일지도 모르는 흑돼지 두루치기를 허겁지겁 맛봤고 서울에 돌아와보니 거의 반병을 들이붓어야 단 맛이 나던,속아서 구입한 오미자 원액만이 제주에 대한 씁쓸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우리는 언젠가부터 어른이란 사실 자기 무게도 견디기가 어려워 곧잘 무너져 내리고 마는 존재들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으니까.
-소설 '복자에게' 中-


세번째 찾았던 제주는  세살이었던 사춘기 여학생이 느끼던 불편하고 뭔가 뒤틀린 감정과는 분명 조금 달랐다. 물론 좋은쪽이었다. 정확히 스물일곱이었던 나는 그때 인생에서 가장 방황하고 있는 삶을 살고 있다고 해도 무방했는데 그 때의 내 로망은 내가 처해있는 현실을 잊고 어디론가 갑자기 훌쩍 떠나는 것이었다. 출발 이틀 전에 무작정 비행기표와 숙소를 구하고 당일배송으로 코발트 블루색의 원피스를 구입했다. 왠지 코발트블루여야 할 것 같았다.


거의 무계획으로 비행기 안에서 내일 일정을 고민하다시피 했으니 개고생을 했던건 당연하다. 제주에서 한여름에 뚜벅이가 여행을 한다는 것이 그야말로 무리수라는 것을 알게된 것은 제주공항에 도착한 다음이었다. 비록 한시간에 한 번오는 버스를 기다리며 팔다리는 검게 그을렀을지었정, 그 때 경험했던 제주는 내게 지금도 산뜻한 원동력이 된다. 둘째날 나홀로 여행족을 위한 투어 버스에서 만났던 간호사 언니가 수국밭에서 찍어준 멋진 인생샷과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동행들과 덜덜 거리는 트럭을 타고 감상했던 후두둑 떨어지던 유성들이 그 원동력의 원천이다. 그래서 내게 제주는 여름이고 내가 입었던 원피스 색처럼 새파란 코발트 블루 같다.


두 여자가 만드는 제주의 이야기, 소설 <복자에게>

그런 의미에서 김금희 작가의 신작 <복자에게>는 내게 그 때의 제주를 떠올리게 한다. 실제로 제주에 머무르며 작품을 구상했다는 작가의 말처럼 단 하나의 이미지나 영상 없이 글 만으로 제주의 푸르른 정취를 느끼기에 충분하다. 이야기는 마치 열 세살의 나처럼 좋게 보면 똑똑하고 나쁘게 보면 영악한 이영초롱이 제주를 찾게 되는 것으로 시작한다. 부모님의 사업 실패로 제주에 있는 고모에게 더부살이 하게 된 영초롱에게 제주로 내려온 것은 마치 역모에 휘말려 유배온 선비의 마음과 같았을 터.  어찌 됐든 타의로 제주에 오게된 그녀는 제주에서 친구 '복자'를 만나지만 뜻하지 않은 일에 휘말려 복자와의 사이가 멀어지게 된다.


그렇게 아쉬움을 남기고 다시 서울로 돌아간 영초롱이 몇십년 후 다시 제주를 찾으며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그리고 성인이 된 후 뜻밖의 상황에서 영초롱은 복자를 다시 만나며 새로운 갈등이 전개된다.


그렇게 갈등은 마치 여름과 가을마다 무섭게 강타하는 태풍처럼 섬을 들쑤셨다가 신기하게도 균형의 평상을 찾아 놓았다.
-소설 '복자에게' 中


이 이야기는 수많은 사람들이 터전으로 여겼던, 그리고 지금도 여기고 있는 제주에 대한 이야기다. 또한 <복자에게>는 두 친구의 우정을 다룬 이야기기도 하다. 그리고 두 친구가 만나는 과정에서 생겨난 갈등 속에서 스멀스멀 피어나는 연애의 기운을 그리고 있는 소설이기도 하다.


나는 <복자에게>를 통해  특정한 장소가 개인에게 주는 의미는 사뭇 위대하다는 것을 느꼈다. 특히 주인공인 영초롱에게 제주란 인생에서 가장 위기를 겪을 때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찾게 되는 장소이며 이러한 위기 속에서 인생을 전환하는 국면을 맞는 장소이기도 하다. 제주를 상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현지인 '복자'를 만나 영초롱은 제주를 통해 새로운 인생을 찾았다. 영초롱에게 분명 이러한 제주는 남다른 의미를 주는 장소임에는 틀림없다.


나 또한 제주는 그랬다.  제주는 다시 찾는 사이에 하나도 변하지 않고 그 자리에 있었지만 제주를 다녀온 후 분명 내 인생은 조금 달라졌다. 무엇인지 정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인생의 지향점이 조금은 바뀌었다. 제주는 소설 <복자에게>의 주인공인 가상인물 영초롱에게도, 현실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도 각기 다른 인생의 의미를 주었다.


언젠가 또 다시 찾게 될 제주에서 나는 또 어떤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될까? 다시 제주에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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