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5년 정도 연애를 하고, 28살이 되면 결혼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내 나이는 어느새인가 33살이고, 이제는 결혼을 하지 못할 것만 같다. 올해부터 만 나이가 적용돼서 2살씩이나 회귀한다지만, 최근 트렌드인 웹 소설처럼 특별한 능력이나 이점을 얻는 것이 아니다.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함께 어려지는 데다가, 그 마저도 오늘이 지남으로써 1살만 회귀하게 되었다. 이 별 볼 일 없는 회귀물 주인공인 나는 나이가 점점 들어가면서 아버지의 결혼 독촉 잔소리도 함께 늘어났다. 늘어나지 않고 줄어드는 것은 오히려 내 결혼 가능성뿐이었다.
사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결혼을 일찍이 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주변 사람들이 아기가 생기자마자 모든 삶이 드라마틱하게 변하는 것을 자주 봐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결혼을 일찍 하고 신혼 기간을 3년쯤 원 없이 가진 뒤에 아기를 계획하고 싶었다. 아마도 신혼의 아름다운 추억들이 아기가 태어난 이후부터 시작될지도 모르는 인내와 고난의 시간들을 버티게 하는 힘이 되어줄 것이라 생각했다. 아기가 고통이란 말은 아니지만, 체력의 한계를 보이며 버거워하는 지인들의 모습을 봐왔기 때문인지 신혼은 내가 계획할 수 있는 일종의 백신 같은 셈이었다. 누구나 그럴듯한 계획은 가지고 있다. 완전히 실패했다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는.
하지만 내 나이는 이미 서른을 넘었다. 그렇다고 결혼을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나는 연애를 할 때도, 항상 결혼을 전제로 생각할 만큼 가벼운 만남은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 마지막 연애도 결혼을 그렸던 사람과 함께였다. 비록 종교라는 중대한 서로의 가치관을 넘어서지 못하고, 끝내 헤어져야 했지만 말이다. 아마 그때 직감했던 듯하다. 나는 아마 결혼을 못할지도 모르겠다고 말이다.
결혼은 내게 반드시 해야 하는 것임과 동시에, 이혼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내가 열 살 때, 부모님이 이혼했기 때문에 내가 만약 결혼을 한다면 같은 선택을 반복하지 않겠다고 항상 다짐했다. 그래서 연애부터 신중했다. 친구들은 내게 '어떻게 연애 시작부터 결혼을 전제로 항상 만나냐'라며, 가볍게 시작해 보길 추천한다. 하지만 결혼이라는 것은 내게 가벼운 무언가가 아니다. 결혼을 생각하는 상대를 만나게 되더라도 귓가에 종이 울리지 않는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사람이라면 평생을 함께해도 괜찮겠다.'는 확신은 내게 연애에서 마저도 꼭 필요했다.
나이가 들어가며 점차 이성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들었다. 하지만 기회가 줄어드는 것 보다도 큰 문제가 있었다. 친구들의 결혼 경험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면서 상대의 조건을 보게 되었다. 스무 살에는 내 기준에 예쁜 얼굴과 고운 마음씨면 충분했는데, 서른 살에는 성격에 가치관, 경제관념, 직업과 소득, 육아관, 이제까지 모아둔 자산까지도 면밀하게 따져야 했다. 아마 마흔 살에는 건강부터 시작해서 더 많은 조건들이 덕지덕지 달라붙지 않을까 싶다. 어느샌가 내게 결혼은 사랑도 중요하지만, 검증이 필요한 것이 되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까 점점 생각도 변해갔다. 이번 생에는 결혼을 못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혼자 사는 삶도 함께 계획해야만 했다. 스물에는 결혼이 필수라고 생각했지만, 서른에는 결혼이 가능성이라 생각했다. 지금은 오히려 선택이라고 생각하며, 아마 마흔에는 주변의 농담처럼 실수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점차 내 생각이 변하는 것은 스스로를 더 잘 알게 되었기 때문인 듯하다. 내가 무엇을 향유할 때 행복한지 알고, 내가 얼마나 이기적인 사람인지 이제는 알게 되었다. 결혼에 대해 진심으로 고민했기에 오히려 선택 가능한 것이 되었고, 스스로를 알게 된 만큼 결혼은 꼭 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게 되었다.
나는 현재의 삶이 꽤나 만족스럽다. 나는 성취에 대해 목표가 뚜렷한 사람이고, 무엇이든 내가 원하면 성취해 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친다. 그렇게 도전하다 보니 현재보다 많은 일들을 해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목표와 성취의 과정, 달성의 기쁨이 연속된다. 그렇기에 결혼을 하게 되면 포기해야 되는 것들이 많을 것 같다. 물론 결혼하면서 얻게 되는 안정감과 신뢰 등도 있겠지만, 결혼은 내가 현재 만족스러운 삶을 버릴 수 있어야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결혼은 내 개인시간 중 일정 부분을 당연하게 포기해야 될 것이다. '모든 것들을 포기하면서 내가 행복할 수 있을까?'라며 만남조차 시작하지 않게 되었다. 물론 외롭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외로움은 내가 삶을 살아가며 채워야만 하는 만족감의 일부다. 그럼에도 혼자 살며 누리는 행복이 더 커지고 있다. 어찌 보면 새로운 사람을 만나지 못하기에 혼자 정신 승리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렸을 때는 상대를 만나며 얻는 행복감이 컸다면, 이제는 비교해 봐야 할 정도로 비율이 조정되고 있다. 예전에는 일초도 고민하지 않고 결혼을 선택할 수 있었다면, 이제는 쇼핑할 때 최저가와 품질, 가성비 등을 비교하듯 기회비용을 따져봐야 한다는 것이다.
출생률이 0.78로 떨어진 현재에 '어쩜 그렇게 스스로만을 생각하니'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국가의 출생률이나, 주변 사람들의 압박으로 인해 결혼을 선택하고 싶지는 않다. 특히 결혼 적령기에 이르러서 또는 '적당한 시기에, 적당한 사람이라서'라는 것이 선택의 기준이 되면 안 된다.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서, 이 사람을 놓치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아서, 내 모든 것을 내어주고 양보해도 괜찮은 사람이라서'가 결혼을 선택하는 이유였으면 좋겠다. 아마 다른 성장 배경과 삶을 대하는 태도, 살아가는 방식들이 다양하기에 맞는 사람을 찾기란 무척이나 힘들 것이다. 웹 소설의 주인공처럼, 나이가 회귀한다고 성공할 때까지 다시 시도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나는 결혼을 하고 싶지만, 아마 결혼은 하지 못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