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군가를 새로이 알게 되면, 일련의 레퍼토리를 읊는다. 말하는 방식이나 단어, 이야기 구조마저 바꾸지 않는다. 기나긴 이야기 끝에 대단한 서사가 있을 것 같지만, 결국 이야기의 핵심은 내가 호기심이 많아 무작정 도전해서 성공해 낸 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백일장 한 번 나가본 적 없던 내가 글을 쓰는 사람이 된 이유, 미술 낙제생이었던 내가 그림 그리기에 열정적인 현재, 혼자 집에서 마제소바나 마라탕까지 해 먹는 비결 등이다.
뿐만 아니다. 무지막지하게 두꺼운 인문학 서적 읽고 뽐내기, 커피와 와인, 위스키의 역사와 마시는 법에 대해 설명하기, 수년 째 수익 내고 있는 나만의 투자 철학 등 가슴을 잔뜩 부풀린 수탉 마냥 자기애 강한 모습으로 힘껏 나를 드러내 보인다. 이처럼 내가 현재 즐기고 있는 취미나 관심사까지 나열이 끝나야만, 새로이 알게 된 누군가를 받아들일 준비가 끝난다. 그저 내가 다재다능한 사람이라 소개가 길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 소개를 듣고, 내가 대단한 사람이라며 치켜세운다. '능력자'라며 부럽다는 사람도 있고, 추진력을 본받고 싶다는 사람도 있고, '아는 것이 왜 이렇게 많냐'하고 감탄하는 사람도 있다. 미루어보건대 나는 남들로부터 그저 칭찬과 인정을 듣고 싶었나 보다. 왜냐하면 내가 노력했던 과정보다는 결과에 집중하여 말하기 때문이다. 학교 시험기간에도 마찬가지였다.
시험 직전에 친구가 내게 묻는다. "공부 많이 했나?". 나는 대답한다. "아니, 그냥 한 번 정도 훑어본 것 같네". 나는 별 다른 노력 없이도 시험을 잘 본 사람으로 보이길 바랐던 듯하다. 그렇게 나는 자존감을 지켰다. 사실 시험 기간이면, 일주일 정도쯤은 집에 들어가지 않고 도서관에서 날밤을 지새웠던 나날들도 숱한 데 말이다. 스스로는 완벽하지 않음을 알고 있지만, 남들에게만큼은 완벽한 사람으로 보이길 원했다.
나는 자존감이 높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나를 유능하고, 다재다능한 데다, 대부분의 일에서 좋은 결과를 내는 사람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내 생각도 그리 다르지 않다. 하지만 나는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장점만 가진 사람이 아님을 안다. 다른 사람에게 잘 공감하지도 못하고, 상대를 앞에 두고 비교 혹은 비판하면서 우월감을 느끼고, 내 목적을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들을 도구처럼 이용하기도 한다. 단지 남들이 알지 못하도록, 잘 숨길뿐이다.
높은 자존감이 좋은 결과를 만들고, 좋은 결과가 다시 자존감을 높게 한다. 이 영원의 굴레에 허덕이고 있으면 자존감은 어느새 나르시시즘의 정도를 강화한다. 완벽한 사람이라는, 멋진 사람이라는, 결국은 어떠한 고난도 이겨낼 사람이라는 나르시시스트의 가면을 쓴다. '나는 이렇게나 멋진 사람인데'라고 생각하다 보니까, 다른 사람들이 눈에 들어올 리 없다. 그 즉시 우월함을 만끽하며, 쓴 가면을 놓지 않으려고 앞선 과정을 반복한다.
대부분의 나르시시스트가 그렇듯이, 나도 다른 사람의 감정에 별 관심이 없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다른 사람의 감정이나 상황에 귀 기울이지 않으니 공감하지 못했다. 자연스레 나는 관심 없는 사람들을 멀리하게 되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도 '굳이'라며 선택에서 늘 제외해 왔고, 이미 알고 지내던 사람 중에도 필요 없다 생각되면 가감 없이 끊어냈다. 나는 혼자만의 힘으로도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것에 두려움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나르시시스트로서 자발적 고립을 선택했다.
내가 진행하는 일과 몰두하는 관심사에서 대부분 기대 이상의 성취를 얻었다. 그 이유를 심도 있게 고민하지 않았을 때만 해도 단지 '내가 잘나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최근 몇몇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면서 자기소개의 과정이 반복되자, 그간 드러내지 못한 나 자신을 계속 감춰야만 했다. 불편함이 반복됐다. 수많은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내 생각만큼 나는 완벽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간의 성취는 단지 내가 호기심이 많아 직접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견디지를 못하는 성격 때문이었다.
나는 도전하는 내 모습에 자아도취를 하고, 나르시시스트의 가면 쓰기를 반복해 왔다. 하지만 이것이 특별한 능력 때문이 아니라 단지 호기심이라는 성격 때문임을 알게 되자, 자존감과 성취의 선순환 고리가 허구임을 깨달았다. 자존감이 무너져 내렸다. 평소 같았으면 자존감을 지키려고, 가면을 벗지 않기 위해서, 레퍼토리를 바꿔서라도 내 능력 때문임을 강조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낮아질 대로 낮아진 자존감은 회복되지 않는다. 나르시시스트에게 낮은 자존감은 붕괴 단추와 마찬가지다.
지금이라도 나르시시스트의 가면 쓰는 것을 멈추고, 내 맨 얼굴을 드러내서 다른 사람들과 감정을 나눠야만 한다. 성공보다는 과정에 초점을 두고, 내가 현재를 살아가고 있음을 알아야만 한다. 실수투성이에 완벽하지 않음을 상대에게도 내비칠 수 있어야 한다. 자존감이 스스로를 사랑하고 존중하는 감정이라기보다, 그 자체로 사랑받을 수 있는 자기 사랑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것이 나르시시스트가 자발적 고립으로부터 벗어나, 다시금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나가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