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부터 내가 바라는 어른의 구체적인 모습을 상상하지 않았지만, 몸이 자라면서 나도 어엿한 어른이 되어 있을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특히나 역사 속에서 국가와 민족, 사회를 위해 자신의 삶과 죽음 등 모든 것을 내던지는 사람들을 보며 '나도 어른이 되면 저런 선택을 할 수 있을까?'하고 생각했던 적이 많았다. 내가 어른이 되면, 그들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이었으면 했다.
내가 스무 살이 되던 즈음, 아버지는 내게 술을 한 잔 따라주며 말했다. "재용아, 너도 이제 어른이니까 앞으로 어떠한 선택을 하던지 나는 네 선택을 믿는다". 아버지의 말을 통해 내가 어른이 되었다고 처음으로 생각했다. 아버지라는 든든한 어른이 나를 항상 믿고 있음을 알게 되자, 내 선택에는 항상 자신감이 생겼다. 내가 혹여나 선택에 실패한다 해도, 나를 묵묵히 지지해 줄 수 있는 어른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택에 책임지기보다 실패했을 때 피할 곳이 있다는 것에 안도했던 것을 보면, 나는 아버지 말처럼 당장 어른이 된 것은 아니었던 듯하다.
그럼에도 나는 하고 싶은 것을 선택함에 있어서 거침이 없었다. 늘 도전하는 사람이었고, 도전 경험 대부분은 성공 경험이 되었다. 하고 싶은 것이 많았기에 한 분야의 장인이 되기보다, 다양한 경험을 쌓는 것에 중독된 것처럼 도전했다. 누군가에게는 대단한, 사회복지사 치고는 독특한, 스스로 느끼기에 대견한 경험을 쌓았다. 초중고 교육 과정에서 주어지지 않았던 선택에 탐닉하면서, 나는 한 동안 어른이 되고 싶었음을 잊고 살았다.
그러다가 세월호나 이태원 참사 같이 선명하게 생동하는 사회 재난을 사회 구성원으로서 함께 견뎌야 했다. 내가 어렸을 때 막연히 동경했던 어른들이 사회에 책임지려고 했던 것처럼, 나는 어른으로서 역할을 다하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가 혹은 미래 세대가 감내해야만 하는 구조적인 사회 문제는 없는지, 미래에 충분히 예상 가능한 사회적 재난은 없을지, 그 상황에 어른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점검해야 했다.
32살의 현재, 나는 어른이라고 말할 수 없을 듯하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은 나를 어른으로 보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객관적으로 보아도 그렇다. 1994년 중위 연령은 29세였지만, 2023년에는 46세로 변화했다. 중위 연령은 '인구를 연령별로 나열했을 때 중간에 있는 사람 나이'를 말한다. 다시 말해 우리 사회는 고령화됐고, 32살쯤은 어린 축에 속한다는 것이다. 내가 막연히 생각했던 어른으로서의 나이가 훌쩍 도망가 버렸다.
고령화는 단순하게 사람들의 나이가 많아지는 것이 아니다. 개인 차원에서도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 기대 수명이 60년이었을 때 30년이 지난 것과, 80년이었을 때 30년이 지난 것은 그 의미가 다르다. 전자라면 삶의 반을 지나온 시점이지만, 후자라면 아직은 성장하고 배우는 시기에 가깝다. 고령화된 현재 사회에 서른 즈음은 어른이라고 인식되지 않는 이유 중에 하나일 것이다. 그저 왕이 되는 것보다 왕처럼 보이는 것이 그를 왕으로 살게 하는 것처럼,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타인의 인정을 무시할 수 없다.
더군다나 주관적으로 내게 어른은 희생의 여부를 떠나서, 사회의 공동선에 대해서 책임지는 사람이어야 한다. 어른이 된다고 해서 무조건 희생만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공동선에 대해 책임지는 과정에서 불가피한 희생이 따르는 경우가 있을 뿐이다. 이를테면 국민연금 개혁이 그렇다. 현재 내가 더 내고, 덜 돌려받는 것만 생각한다면 당연히 개혁에 반대할 수밖에 없다. 노인들이 연금 수익률이 높다며 비난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과거의 어른들이 우리 사회를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으로 바꿔냈다. 그들의 피와 땀으로 일궈냈기에, 나는 피와 땀 한 방울조차도 흘리지 않고 사회보장 시스템 안에서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당시 어른들이 겪었던 절대적 빈곤의 어려움을 모르고 자랐다. 내가 혜택 받은 것은 셈에 올리지 않고, 내 이익만 요구하는 것은 내가 생각했던 어른의 모습이 아니다. 따라서 미래 세대를 위해서 국민연금 개혁이 시급하게 필요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저 내가 어른으로 책임지는 방식과 예전 어른들이 책임지는 방식이 달라졌을 뿐이다.
돌아보면 내가 선택하고 경험했던 도전들은 온전히 내 개인을 위함이었다. 내가 성취한 것에 자부심을 느끼며 도전했고, 내가 이후에 좋은 직장에 다니기 위해 공부했고, 내가 잘 살고 싶어서 경험을 쌓았다. 내가 막연히 동경하던 어른의 모습은 스스로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은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내가 동경했던 어른의 모습은 사회 규칙이나 합의에 순응해 사는 것을 넘어, 조금 손해를 볼지라도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서 행동하는 모습이었다.
물론 객관적 나이로 어른이 된다는 것이 꼭 중위 연령과 일치한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고령화되며 어른이 될 시점이 늦어졌으니까, 내가 어른으로서 책임을 다 하지 못한다고 느끼는 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주관적 관점에서 책임지는 어른이 되도록 준비를 할 수 있는 기회다. 나이가 차서 어쩌다가 중위 연령이 되어 어른이 되는 것 말고, 행동뿐 아니라 공동체에 책임질 줄 아는 어른이 되고 싶다. 비록 그 책임으로 인해 많은 것을 잃게 될지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