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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용 Jan 10. 2024

연애의 끝은 결혼이 아니다.

내게 연애는 단지 결혼의 과정이었다. 물론 이제껏 해왔던 모든 연애가 결혼으로 끝이 났던 것은 아니었지만, 애초에 결혼 상대가 아니라고 생각되면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 결혼하지 않을 사람이라면 끝이 정해져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게 연애만 한다는 가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내게 연애는 상대와 결혼의 확신을 쌓아가는 시간이었고, 상대의 성향을 파악하며 결혼의 상상을 구체화하는 시간들이었다.


‘이 사람이라면 결혼할 수 있겠다.’라고 확신이 들었던 사람도 있었다. 우리는 이십 대 초반에 번듯한 직장도 없는 학생이었지만, 직관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나는 감정 기복이 크지 않아서 상대를 통해 느끼는 안정감 또한 결혼에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했다. 그녀도 차분한 성격에 돌발 행동이 적었다. 우리들은 항상 결혼한 이후의 모습을 상상했고, 미래를 함께 그리며 확신을 쌓았다.

ⓒ Hanna Morris of Unsplah. All right reserved.

나는 우리의 상상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는 현재의 행복쯤은 결혼 이후로 미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은 달랐다. 미래의 행복도 좋지만, 현재의 충만한 사랑도 함께 쌓길 원했다. 결국에는 다른 이유로 시작된 다툼이었지만, 나는 더 이상 미래를 그리지 않는 그녀와는 결혼할 수 없다 생각했고 헤어짐을 전했다. 미래를 그려나감과 동시에 사랑의 확신을 나누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음을 이제는 알지만,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나는 몇 번의 연애를 거치며 내가 어떠한 사람인지를 보다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나는 사랑 앞에서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사랑의 시작 단계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설렘은 잠깐이나마 상대를 향한 사랑을 내보이도록 한다. 하지만 그 설렘이 가라앉을 때쯤 내게 연애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전락한다. 내게 있어 연애는 현존하는 사랑의 감정을 나누며 그 순간에 행복하기보다 미래의 행복한 결혼이 목적 그 자체였던 듯하다.


이 경험적 근거는 내가 계속 결혼을 꿈꿔도 되는 사람인지를 되묻도록 했다. 나는 연애를 결혼의 과정쯤으로 여겼고, 내가 상대에게 사랑의 확신을 지속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이란 자기 확신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아마 연애를 하게 되면 상대가 나로 인해서 상처를 받을 것이라고 생각이 들자, 연애를 포기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는 결국 현재 모습에서 변하지 않겠다는 일종의 다짐이며, 결혼이라는 과업에서 실패할 수 있음을 합리화하기 위한 방어기제처럼 느껴졌다. 이처럼 이타적임을 가장한 생각마저 이기적인 마음에서 비롯 됐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최근에 지인이 내게 전했던 단 두 마디가 이 모든 사념을 하등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나는 그에게 굳건히 변하지 않을 내 모습과 쌓아왔던 단단한 방어 기제들에 대해 말했다. 그러나 돌아온 그의 대답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연애는 왜 꼭 결혼으로 끝나요? 결혼하지 않고 50살까지 연애만 할 수도 있는 거 아니에요?”. 연애가 결혼의 과정이라는 전제가 무너졌다. 나는 전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지만, 그의 이야기를 통해 이제껏 내 논리가 모순 투성이었음을 알았다.

ⓒ Gabby Orcutt of Unsplah. All right reserved.

연애는 결혼을 위한 과정이다. 하지만 꼭 결혼으로만 끝나지 않아도 괜찮은 것이었다. 연애에서 결혼이라는 목표가 사라지자, 미래에 행복을 의탁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와 현재의 사랑과 진실한 만남에 초점을 둘 수가 있다. 상대가 필요로 하는 감정을 나누는 것에 집중하고, 미래에 준비된 사람으로서 결혼하기 위해 스스로를 압박했던 과업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스스로를 억압하는 것들로부터의 해방이었다.


누군가는 당연하게 느끼고 생각했던 것일지도 모르지만, 켜켜이 쌓은 전제조건으로 인해서 전혀 보지 못하는 것이 생기기도 한다. 내 삶은 마치 결혼을 위해 평생을 달려온 경주마의 삶과 같았고, 흔히 경주마가 착용하듯 눈가리개를 착용하고 살았다. 물론 당장 다시금 연애를 시작하고, 결혼 따위는 하지 않겠다는 선언은 아니다. 하지만 만약 연애를 시작한다면, 더 이상 이기적인 모습으로 만남을 이어가지 않을 수 있을 듯하다.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도 넓은 초원에서 풀을 뜯으며 한가로이 삶을 보낼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내가 그래왔던 것처럼 그릇된 방식으로 사랑을 지속하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랑에는 다양한 방식들이 존재하겠지만, 타자와의 관계 맺기라는 본질에서 벗어나 결혼이라는 것을 과업처럼 여기고 강박적으로 혼자 집착했던 듯하다. 추측하건대 부모님의 이혼으로 인해 결혼은 내게 실패해서는 안 될 그 무언가가 돼버렸을 수 있다. 가부장제도를 좋다고 여기지 않지만, 나도 모르게 스며든 장남으로서 부여된 역할에 불안을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연애를 결혼과 분리함으로써 불안으로부터 해방되었고, 사랑은 명확한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 정의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연애의 끝은 단순히 결혼이 아니고, 그저 연애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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