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 선생님과 원만한 합의를 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한 달에 한 번 머리를 자르러 미용실에 간다. 굳이 달력에 날짜를 표시해두지 않아도, 한 달이 지났음은 거울을 보고 알 수 있다. 머리를 자르기 2주 전부터는 머리가 지저분해졌음을 느끼고, 1주 전부터는 지저분한 머리 때문에 일상생활에서 말과 행동에 자신감이 없어진다. 미용실 예약할 때가 된 것이다. 그러나 미용실을 예약하며 매월 반복되는 문제가 있다. 머리 자르기 이틀 전부터, 갑자기 마음이 요동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머리를 곧 자른다고 생각하니까 자연스러워 보이면서, 지금의 상태가 마음에 든다. 심지어는 머리를 자르기 하루 전, 미용실 예약을 취소해야 될지 고민한다. 그렇게 '1주일만 더 버텨볼까.'라는 생각까지 가 닿는다. 내 감정은 계속해서 극단을 왔다 갔다 한다. 그러다 머리가 가장 예쁘다고 느끼는 절정의 순간은 미용실 의자에 앉아 거울을 바라볼 때다. 그제야 머리를 자르고 나서 익숙지 않은 내 모습에 머리 자르는 것을 망설이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그렇다. 이제는 놓아주어야 하는 순간이다.
미용실 거울에는 머리가 예쁘게 보이도록 하는 기술이 적용됐다거나, 미용의자 위에 조명이 절묘하게 배치가 돼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사실이 아님을 쉬이 알 수 있다. 얼굴이 예뻐 보이게 하려면 오목 거울을 사용해야 할 텐데, 사람마다 앉은키가 다르니 일괄적으로 맞출 수 없다. 일어서서 거울을 보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누구나 예뻐 보이는 거울은 있을 수 없다. 또 조명은 머리 바로 위에 위치해 있다. 따라서 조명의 목적은 예뻐 보이는 것보다, 머리를 자를 때 정확하게 보기 위함이다. 오히려 직각으로 머리를 비추는 조명은 얼굴의 곳곳을 적나라하게 보이도록 할 가능성이 크다.
그럼에도 미용의자에 앉아서 본 내 머리가 예쁘다고 생각한 이유는 아마 아쉬움과 익숙함이 이유인 듯하다. 이미 어렸을 때부터의 숱한 경험으로 머리를 자르고 나면, 자연스럽고 익숙했던 머리카락이 한순간 사라지고 단정한 듯 하지만 어색한 머리에 이상함을 느낀다. 잘려나간 아쉬움이 부르는 상실감은 덤이다.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머리는 내 눈에 익숙해질 데로 익숙해진 상태다. 나는 변화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아님에도, 머리를 자르고 나면 내 모습이 낯설어질 것을 안다. 그래서 조금이나마 익숙한 지금의 머리가 예뻐 보이고, 변화가 두려워지기 마련이다.
이것을 반대로 활용하면 머리를 자르더라도, 절대 실패하지 않는 방법도 찾을 수 있다. 나는 미용실 디자이너 선생님에게 독특한 요구를 한다. 처음에는 웃지 못할 이 요구를 그에게 전달하고 서로 합의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지만, 이제는 말하지 않아도 내가 원하는 요구대로 머리카락을 잘라준다. 머리를 절대로 실패하지 않는 독특한 나의 방법은 이것이다. "머리 자른 지, 2~3주 정도 지난 것처럼 잘라주세요"라고 말하기.
이제까지의 경험으로 비추어 봤을 때, 디자이너 선생님은 내가 잘라달라고 하는 것보다 항상 더 많이 자른다. 심지어 머리 감기 전에는 내가 원하던 정도까지 잘랐다고 생각될 때도 있지만, 샴푸를 하고 나면 예상보다도 짧아진 머리에 참담함을 느낄 때가 왕왕 있다. 나는 이렇게 참담함을 느낄 때면, 거짓말하다가 어른에게 들킨 아이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나는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차마 얼굴을 들 수 없다. 구레나룻을 남겨 달라 그렇게 부탁했지만, 앞머리는 눈썹 아래로 내려오게 해 달라 간곡히 요청했건만 남아있을 리 없다.
그제야 심각함을 느낀 디자이너 선생님은 내게 너스레를 떨기 시작한다. "손님! 그래도 돈 받고 머리 자르는데, 머리 자른 티는 내야지요". 남자는 머리빨이라고 했다. 예상보다 많이 잘려나간 머리로 인해 곤두박질친 내 자존감으로 인해서 특별한 대꾸도 하지 못한 채 미용실을 나온다. 다시는 그 미용실에 가지 않겠다고 다짐, 또 다짐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인고의 실패 끝에 찾아낸 방법이다.
사실 특별한 방법은 아닐지도 모른다. 자연스러웠던 머리를 타의적으로 많이 잘리며 생기는 상실감, 익숙지 않은 머리를 마주하며 느끼는 어색함을 미연에 차단해야 한다. 이 방법의 핵심은 머리를 자른 전후로 극명한 대비가 나지 않게 해 익숙함을 유지하는 것이다.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잃지 말자.'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예상치 못하게 사라져 버린 익숙함은 내게 소중함 그 자체이기에 상실감이 당연히 크다. 2~3주 지난 것처럼 잘라달라고 해도, 자르고 나서 거울을 보면 막상 그렇게 지저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내가 생각하는 2~3주와 디자이너 선생님이 생각하는 2~3주가 다르기 때문이다.
디자이너 선생님에게 머리를 자른 티가 전혀 나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것을 명확하게 전달해야 한다. 이토록 내가 원하는 것은 그저 현재의 자연스러움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간절히 호소해야만 한다. 내가 원하는 머리 스타일의 사진을 준비해 가는 것 만으로는 사람마다 모질과 두상, 얼굴형이 다르기 때문에 실패할 확률이 높다. 실패하지 않고 머리를 자르려면, 돈을 내고 일방적으로 서비스를 받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디자이너 선생님과 원만한 합의가 필요하다.
어떻게 보면 머리를 실패한다는 것은 그저 내 마음속에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익숙함을 자연스러움이라고 받아들이며, 성공으로 판단한다. 그 머리가 다른 사람들에는 객관적으로 예쁘지 않다고 여겨질 수 있음에도 말이다. 그러나 스타일은 주관이, 즉 내 마음의 판단이 많은 영향을 미치는 영역이다. 따라서 내 마음속에만 있는 기준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지키며 익숙함을 앞으로도 유지할 것이다. 이제는 머리를 자르러 가기 전에 마음이 요동치는 일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