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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용 Aug 31. 2023

제가 '프로불편러'라고요?

나는 아침에 샤워를 할 때면 꼭 아이패드를 챙긴다. 유튜브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뉴스를 보고 듣기 위함이다. 유튜브로 뉴스를 보면, 실시간 채팅도 함께 볼 수 있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볼 수가 있다는 장점이 있다. 어차피 샤워할 때는 보는 것보다도 듣는 것 위주이기 때문에, 화면이 조금 작아진다 해도 전혀 개의치 않는다. 그렇게 매일 아침, 샤워를 하면서 뉴스를 보고 또 듣는다.


뉴스에서 전하는 이슈나 사실, 드러난 현상과 기록을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객관적 사실을 바탕으로 내 생각은 어떠한지 고민하는 것도 필요하다. 또한 같은 사실을 보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내 것과 비교해 보는 과정도 다양성을 함양하기 위해 빠져서 안 되는 과정이다. 특히나 스마트폰과 알고리즘이 삶에 스며들면서 사용자가 선호하는 이슈나 제품뿐만 아니라 앞으로 보게 될 콘텐츠까지 추천해 주기에 단편적인 시각으로 편향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꼭 필요한 과정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최근에 실시간 채팅이나 각종 SNS와 뉴스 등의 댓글들을 보고 있다 보면, 이 노력들이 내가 다양성을 키우는 것에 도움이 되는지 의문이 들 때가 많다. 후쿠시마 오염류 방수와 이상동기 범죄, 강아지 오마카세, 기후위기 등 매일 새로운 이슈들이 넘쳐난다. 다만 이슈가 무엇인지는 상관없단 듯이 댓글과 채팅에는 혐오 감정들 또한 넘쳐난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나 이슈, 사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라기보다는 상대 감정에 날카로운 자국을 내는 것이 목적인 비난에 가깝다.

ⓒ Jack Finnigan of Unsplah. All right reserved.

이러한 현상은 사회 불평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먼저 내가 처해있는 상황에 상대적으로 보다 가까운 준거집단을 찾는다. 내가 속할 준거집단의 이야기를 통해 공감하고, 나를 온전히 이해해 주는 것 같은 느낌에 준거집단의 이야기만을 골라서 듣는다. 더군다나 알고리즘은 내가 선호하는 이야기만을 추천해 주고, 상대집단의 이야기는 차단한다. 반복되는 준거집단으로부터의 이야기들은 어느 순간에 확신이 되고, 진리가 된다. 사회가 불평등할수록 내가 속할 수 있는 준거집단의 선택지가 줄어든다. 준거집단은 '모 아니면 도'가 되고, 불평등은 이 경계를 보다 명확히 한다.


물론 우리네 삶이 정치와 완벽히 분리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이것은 정치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개인은 기준에 따라 여러 가지 준거집단을 선택할 수 있다. 이를테면 돈과 성별, 정치 성향, 지역, 세대 등의 기준들에 따라 스스로가 속할 수 있는 곳을 선택한다. 하지만 각 기준들의 불평등이 심해지며 최근 일어나는 양상을 보자면, 양 극단으로 내몰리다 못해 찢겨 나간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심지어 몇 가지 기준을 임의대로 묶어서 여러 집단을 함께 혐오하는 광경도 쉬이 볼 수 있다.


이 현상을 심화시키는 것 중에는 온라인 생태계도 수많은 원인 중 하나일 것이다. 의사표현의 자유는 당연히 보장되어야겠지만, 온라인이라는 공간의 특성에 따라 자신을 드러내지 않을 수 있다 보니 자극적인 표현을 사용하기 쉽다. 심지어 자극적이고 원색적인 표현은 지지하는 준거집단의 구성원들에게 반응이 좋을 수밖에 없다. 몇몇 플랫폼에는 댓글에 '좋아요'나 '하트'를 눌러 공감할 수 있도록 되어있는데, 더 많은 공감을 얻기 위해서는 더욱 상대를 자극할 수 있는 표현을 사용해야 한다.


또한 게시물에 공감의 표현은 극히 제한되어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좋아요'를 눌러 공감하거나, 아무것도 누르지 못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간혹 '싫어요' 등의 가지 감정을 누를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경우도 있지만, 사람의 복잡 미묘한 감정을 좋고 나쁨만으로 판단하도록 유도하여 다양성을 차단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심지어 이렇게 쌓인 공감의 수가 높은 게시물이나 댓글은 상위 노출되고, 혐오를 확산한다.


일종의 '집단혐오의 놀이화'인 셈이다. 더욱 상대를 자극할만한 단어를 선택하고, 상대를 맹목적으로 비난할 창의적인 문장을 만들고, 그렇게 쓰인 비난에 공감하며 우월감을 느낀다. 이 과정에 사실이 아닌 가짜뉴스가 만들어지고, 확대되고, 또 재생산된다. 준거집단의 이야기만 듣는 사람에게는 사실처럼 느껴질 테니 말이다. 만약 상대집단이 사회적으로 소수자 거나, 힘의 차이가 월등히 나는 경우라면 그 정도가 더 심하게 나타난다. 혐오와 놀이라는 두 단어는 함께 쓰이면 안 되는 단어라고 생각하지만, 이미 드러난 현상들을 보면 따로 쓰기 어렵게 느껴지는 것이 현실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내가 현실에서 만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회복지사인 내게 이렇게 말한다. '아이고, 좋은 일 하시네요'. 온라인에서 마주해야 했던 수많은 혐오, 이를테면 복지의 확대를 외치는 사람은 공산당이라는 일종의 혐오 표현들이 오프라인에서 만큼은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혹시나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 사회복지 종사자이거나, 변화를 함께 만들어가는 주민들이거나, 협업하기 위해 만나는 사람들이라서 편향되어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오프라인, 즉 현실에서는 본인이 온전히 드러나기 때문에 혐오하는 감정들을 주변 사람들에게 내뱉기에 안전하지 않아서가 아닐까.


나는 사회복지사로서 삶과 세상의 많은 영역에서 변화를 소망한다. 변화는 항상 현재보다 나은 세상과 삶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변화는 불평등하다고 여겨지거나, 곳곳에 개선이 필요하거나, 삶의 환경이 바뀌어야만 가능하다. 나는 사회복지사로서 변화를 위해 예민하게 주변을 관찰하고, 민감하게 변화가 필요한 구조들을 찾고, 변화가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능동적으로 변화를 위해 움직여야만 한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변화가 필요하다 말하는 내 이야기가 불편하고, 변화를 위해 움직이는 내 행동이 못마땅하며, 변화 자체를 쓸데없는 일로 여기기도 한다.

ⓒ Hay s of Unsplah. All right reserved.

변화하지 않아서 생기는 고통은 내 것이 아니라 타인의 것이기 때문이다. 고통받는 사람이 나였다면, 변화가 필요하지 않다고 이야기할 사람은 없다. 언제나 내가 고통받을 수 있음을 인지하고, 변화의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있어야 한다. 따라서 변화가 고통보다 가능성이라는 단어가 함께 쓰이는 사회였으면 좋겠다. 가능성은 때로 0에 가까운 경우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0에 가깝다고 하더라도 0이 아니라면, 언제든 바뀔 수 있음을 내포한다. 나는 변화의 가능성을 믿기에 오늘도 TV보다 유튜브로 뉴스를 본다. 민감하게 반응하고, 불편함을 느끼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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