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서른세 살의 생일을 맞았다. 만 나이로는 서른두 살이 되었고, 살아온 날짜는 32년 하고도 7일을 살았다. 서른세 번째 생일인데, 7일을 어떻게 더 살 수 있냐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지구가 태양을 열두 바퀴 도는 것을 1년으로 셈한다. 하지만 이 주기는 정확히 정수로 떨어지지 않기에 윤달을 끼워 넣는다. 그렇게 365.25일을 여러 해 살아가다 보면 '사람이 정한 기준'에 따라서 7일을 더 살게 되는 셈이다.
나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그중에서도 부산이라는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양력 1991년 10월 24일 오전 3시경에, 나는 어머니의 뱃속에서 세상으로 나왔다. 그러나 내가 살아가고 있는 표준 시간이 정확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태어난 것으로부터 한참이나 뒤였다. 일본과 중국의 중간에서, 실제와 대략 30분 정도의 차이를 모르면서도 사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내가 사는 공간의 다른 사람들이 흘러가는 시간을 함께 믿고 따르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내가 존재하고 있는 시간도 정의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사람에 따라, 사회가 합의하는 기준에 따라, 문화를 공유하는 사람들이 함께 믿는 것에 따라, 절대 진리와 같이 여겨지는 것 또한 언제든지 변할 수 있음을 이제는 안다. 그렇다면 전 세계가 관례처럼 따르고 있는 한 시간 단위의 표준시간을 바뀔 수도 있다. 아마도 내 생일은 30분 당겨질 것이다. 공간도 마찬가지다. 최근에 전쟁 중인 예루살렘이라는 지역이 그렇다. 한때는 이집트 인의 땅이었다가, 팔레스타인, 로마인, 페르시아인, 현재는 유대인들의 땅이 된 곳이다.
현실을 구성하는 시공간마저도 달라질 수 있으니,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합의에 의해 정해지는 사회의 규정들과 법, 문화도 언제든지 달라질 수 있다. 최근 이슈가 되었던 교권과 아동 인권이 대립하는 문제만 봐도 그렇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부모님의 체벌은 이상할 것이 없었다. 심지어 선생님에게 '많은 지도와 편달을 부탁한다.'는 말이 인사처럼 쓰였던 때였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그때는 정말 신나게 맞았다.
'가난한 사람'도 마찬가지다. 종종 시민들에게 가난한 사람이 누구인지 물으면, 대개 '기초생활보장수급자'라고 답한다. 하지만 '기초생활보장수급자'가 가난한 사람이라 정의한다면, 우리나라에 가난한 사람이 없어야 맞다. 왜냐하면 기초생활보장은 '가구의 소득 인정액이 최저생계비 이하로, 생계, 주거, 교육, 해산, 장제 등의 급여를 국가에서 보장'해 주기 때문이다.
시대와 사회가 변해가며 사회보장 비율이나 최저생계 소득인정액, 인식도 확장된다. 따라서 '가난한 사람'에 대한 정의나 기준도 바뀔 수 있다. 이를테면 절대적이기보다 상대적으로 가난한 사람이라던지, 돈을 기준으로 잡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고립이나 외로움의 정도로 기준을 바꾼다던지, 사회 불평등에 대한 경험을 척도로 삼는다던지 하는 것도 앞으로는 충분히 함께 고민해야 한다. 특히 사회 변화에 밀접하게 반응하는 사회복지 시스템은 그 변화에 더 민감해야만 한다.
하지만 현실의 사회복지는 그렇지 않음을 느낄 때가 많다. 어느덧 선진국의 반열에 오른 우리 사회는 절대적 빈곤에서 벗어나 상대적 빈곤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지만 공공과 민간기관은 아직 최저생계비, 중위소득을 기준으로 들어 서비스를 제한하는 경우가 많다. 뿐만 아니다. 사회복지 기관 평가는 분명 서비스의 효과성과 시설의 운영을 효율적으로 평가하기 위해 '사람들이 정한 기준'에 따라 진행된다.
하지만 이를 준비하는 과정을 어깨너머 보면 효과적 서비스 제공은 둘째로 밀려나고, 사회 변화에 밀접하게 반응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평가가 시작되면, 비효율적인 자료 재생산이 시작된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그 당시에는 맞고, 평가를 준비하는 지금 보기에는 틀렸다. 사회복지사들은 종종 이렇게 말한다. "내가 평가를 잘 받기 위해서 나무를 몇 그루나 베었는지 이제는 셀 수가 없다". 무수히 쌓여가는 이면지들을 보면 사회복지 평가가 과연 우리 주민들에게 서비스를 더욱 잘 전달하기 위함인지 알 수 없다.
행정 서류들과 예산 집행에 대한 증빙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국민의 세금, 즉 보조금으로 집행되는 예산이니 더욱 투명하고 철저해야 한다. 시민들의 후원금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우리의 사회복지는 서류에만 존재하는 듯하다. 평가는 대개 서류와 산출 실적이 중요하다. 예를 들면 고독한 주민과 나눈 한 시간의 상담도 산출 횟수는 1회이고, 전화나 문자 발송도 똑같은 1회로 평가된다. 실제 고립감이나 외로움이 있는 사람에게 그 해소의 정도는 아마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히 다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서류에서는 고독한 사람이 없지만, 현장에서는 고독한 사람이 버젓이 존재한다. 거기에는 며칠 밤낮을 고생하며 평가만을 위한 서류를 만들어 낸 고된 사회복지사도 있다.
'사람이 정한 기준'에 따라 복지 사업은 기획되고 진행된다. 하지만 시대와 사회가 바뀌어도, 사회복지는 아직 절대적 빈곤사회의 서비스 제공 기틀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 그래서 몇 개를 주민들에게 전달했고, 몇 번이나 주민들과 접촉했는지 횟수가 중요하다. 마치 우리나라 표준시가 일본 도쿄의 표준시임을 알고도 바꾸지 않는 것과 같다.
따라서 사회복지는 단순 서비스 제공뿐 아니라, 사람들이 자각하는 시공간을 근본적으로 바꿔 나가야 한다. 사회보장의 영역을 확장하고, 시민들이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문화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이미 정해진 것은 절대적인 기준이 아님을 알고, 그저 나와 같은 '사람이 정한 기준'임을 안다면 사회를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바꿔 내야만 한다. 무릇 사회복지사는 그래야만 한다. 이것이 32년 하고도 7일을 산 내가 알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