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이 사람들을 만나면 그 상대는 내 얼굴을 평가하려는 사람이 많다. 이십 대인 줄 알았다던가, 연예인 중 누구를 닮았다던가, 얼굴이 작다던가 하는 것들 말이다. 상대의 얼굴 평가가 점차 금기시되는 문화로 사회는 나아가고 있지만, 대부분이 칭찬이라서 듣기 싫지 않았기에 무던히 넘어간다. 나도 내 외모가 꽤 만족스럽다. 더군다나 타인에게 인정까지 받으니 그 만족이 사그라들리 없다.
외모지상주의가 사람들에게 영향을 많이 미치는 문화권에서 살다 보니, 외모는 내게 있어 강점으로 작용한다. 이를테면 사람들은 내게 친근감을 갖고 먼저 다가오며, 대체로 내게 긍정적인 첫인상을 느끼며, 내가 부단히 애쓰지 않아도 호감을 얻기 쉽다. 외모는 노력으로 얻은 성취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를 만끽한다. 단지 내가 남들에게 보이는 외모로 인해 생기는 이득과 손실을 따져보면, 대부분 이득이 상대적으로 많은 듯하다.
그래서인지 나는 '외모지상주의'에 양가적인 감정을 느낀다. 외모만으로 상대의 가치를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이 관념에서 나는 손해를 보지 않는 입장이라 내가 외모를 통해 평가받는 것에 대해서는 그다지 불편함이 없다. 다시 말해 외모지상주의가 옳지 않음을 알고 있지만, 내가 현재 이득을 보는 상황에 대해서는 멈추려고 적극적 노력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간과하고 있던 것이 있다. 외모에는 얼굴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몸도 포함된다. 나는 대한민국의 남자 평균 키보다 작고, 우락부락한 근육은 갖고 있지 않다. 내가 추구하는 근육은 잔 근육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일종의 자기기만일지도 모르겠다. 간혹 늦은 저녁에 강아지와 산책을 할 때면, 덩치 큰 남자가 옆으로 지나가기만 해도 위협을 느낄 때가 왕왕 있다.
그럴 때 나는 법치주의와 CCTV, 경찰 시스템과 같은 사회 안전망을 생각하며, 가녀린 존재로서 존재한다. 그 순간 '내가 위협받았을 때, 맞서 싸울 수 있을까?' 하며 상상한다. 하지만 상상의 끝은 싸움의 승패가 아니다. 현대는 야만적 본능의 사회가 아님을 되뇌며, 상대를 폭압적으로 제압하는 용도의 강인한 신체는 쓸모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내가 이득을 보는 외모도 본능에 의한 것임을 잊은 채 말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은 시대나 문화에 따라 다르겠지만, 항상 아름다움을 추구해 왔고 그것이 반복된 역사의 굴레임을 증명하는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이를테면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도, <삼국지연의>에 지략가 '방통'도, 전 세계를 춤추게 만들었던 '싸이'도 데뷔 당시에 외모로 인해 곤란한 상황이 있었다고 한다. 대중가수였던 싸이는 차치하고서, 외모를 큰 강점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직업이 아닌 철학가나 지략가임에도 외모는 그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소크라테스의 사형 선고 이유 중 하나가 추한 외모였다는 설도 있고, 방통은 못생긴 외모 때문에 유비가 지방 한직으로 보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물론 가설이나 소설의 맹점이 있다. 하지만 외모에 관한 사례는 현재와 과거를 나누지 않는 듯하다. 사람들이 가설과 소설에 충분히 그럴 수 있음에 대한 가능성을, 현재에 대입한다 하더라도 그리 다르지 않음을, 상황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할 수 있다는 점이 외모를 평가하는 것에 시대적인 구분이 없음을 반증한다.
사람은 실제로 80% 이상의 감각 수용을 시각에 의존한다. 따라서 시각의 직관성을 바탕으로 외모를 바라보는 것은 선택보다 본능에 가까운 영역이다. 그러나 소위 문명화된다는 것은 본능에만 의존해 살아가도 괜찮다는 사회 합의가 아니다. 더군다나 강인한 신체는 폭압적이고, 아름다운 얼굴은 본능으로서 용인가능하다 느끼는 것도 내 논리적 모순이다. 본능에 따라서 외모를 직관적으로 인식하더라도, 이를 상대에게 내비치지 않아야 한다.
드러내지 않는 것과 함께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직 외모만이 상대를 평가하는 유일한 요인이면 안 된다. 상대와 관계를 맺어가기 위한 친근한 말투와 스스로를 가꾸려는 오히려 드러나지 않은 노력, 각자 다른 영역에서의 고유한 전문성 등 복합적으로 상대를 파악하기 위한 요인이 있어야 한다. 한 사람은 외모나 재력, 지식 등의 요인으로만 볼 수 없다. 사람은 마치 레고와 같아서 다양한 모습을 쌓아 완성되었을 때의 모습을 보아야 한다. 직관적인 것은 쉽지만, 쌓인 과정을 보는 기다림은 어렵다. 문명화된 사회 구성원이란 쉬운 것보다도 때로는 어려운 것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누군가 내 외모를 칭찬하는 것에 묵인 또는 용인하는 것도 외모지상주의를 가속화하는 일임을 알고, 칭찬을 해준 상대가 민망하지 않도록 거절하는 연습도 필요하다. 칭찬으로 인한 내 개인의 만족보다 문명화된 사회의 합의가 더 중요한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직관적 정보인 외모의 아름다움을 단지 평가절하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외모 말고도 상대의 다양한 아름다움을 보기 위한 노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