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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용 Aug 26. 2022

수치스러워야 한다는 오만

타인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길을 가다 노숙인 아저씨가 도로를 향해 오줌 누시는 것을 봤다. 순간 뇌 정지.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몰라 그냥 가던 길을 갔다. 그 노숙인 아저씨에게는 '자신의 성기를 타인에게 보임과 동시에 오줌 누는 것이 수치스럽지 않을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내게는 다른 사람이 수치스럽다고 느껴야 한다는 것을 강요할 권리가 없다.


'수치(羞恥)'의 정의는 다른 사람을 볼 낯이 없거나 스스로 떳떳하지 못한 느낌이다. 노숙인 아저씨의 행동을 보고 '수치스러워야 한다'라고 판단했던 것은 내 기준에 의한 것이었고, 오만이었다. 나는 타인을 멋대로 판단해서도 안 되었고, 수치심을 느끼도록 강요해서도 안 된다. 수치심은 타인에 의해 강요될 수도, 되어서도 안 된다.


그럼에도 '수치심'은 시대, 상황, 지배 이념, 문화, 국가 등에 의해서 판단의 기준이 조정될 수 있다. 어렸을 때만 해도 남자와 여자의 역할과 의무가 명확하게 분리되어 있었다. 시대가 변하면서 성 역할 구분이 사라지고 있는 중이다. 성 역할 구분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볼 수 없지만,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음은 명확한 사실이며 바람직한 경향성이다. 이렇게 변화하는 사회의 기준과 문화는 개인이 현상을 판단하는 근거가 된다.


옷을 벗는다는 것이 수치스러울까? 타인에게 성기를 내보인다는 것이 수치스러울까? 집에 있을 때면 나는 대게 속옷만 입고 있다. 우리 집이나 친구 집에 가서 술 한잔 기울일 때도 속옷만 입고 먹기도 한다. 노지 캠핑을 하면서 아무도 없는 산 중턱에 있던 계곡에서는 속옷조차 입지 않고 친구들과 계곡물에 몸을 담그고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맥주를 마셨다. 나는 수치스럽지 않았다.


'수치심'은 절대적이기보다는 가변적이다. 사회가 가지는 관념에 따라 변하고, 그것을 수치스럽다고 판단하는 것은 개인의 몫이다. 수치스럽다고 느끼는 것은 2가지 과정으로 진행된다. 사회 또는 집단에서 몇몇 부끄럽다고 여기는 행동이 정의되고, 그렇게 공유되는 관념을 개인이 오롯이 판단한다. 사회가 수치스럽다고 판단하더라도 개인이 수치스럽다고 느끼지 않으면 수치심은 존재할 수 없다.


개인의 판단에 개입할 수 없기에, 우리는 사회 또는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바람직한 수치심을 정의해나갈 책임이 있다. 돈에 의해 사람의 존엄성이 판단되지 않는 사회, 성 역할에 따라 차별받지 않는 사회, 신체 구조의 특성 및 연령에 따라 선입견 없이 어우러질 수 있는 사회. '수치심'이 올바르게 정의되는 사회에서는 존엄성이, 다양성이, 공동체성이 기능하는 사회일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개인의 '수치심'에 대한 기준에 타인의 판단이 들어갈 가능성이 낮을 것이다. 타인의 상황에서 생각하고, 타인의 입장에 공감하며, 타인의 행위 자체를 바라보게 될 것이다. 수치스러워야 한다는 오만이 필요 없는 사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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