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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용 Aug 31. 2022

순간을 온전히 살다.

나와 너, 그리고 우리

길을 건너기 위해 잠시 멈춰 서서 땅을 바라봤는데, 보도블록 사이에 피어난 조그마한 새싹을 보았다. 아마 누구나 이런 경험을 갖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전봇대 귀퉁이에 피어난 민들레, 돌담 사이에 피어난 이름 모를 꽃, 창 틀에 자리 잡은 새싹. 이렇게 혹독하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 어떻게 꽃을, 새싹을 틔울 수 있었을까?

사실 이 문제는 아주 간단하다. 자랄 수 있는 환경이니까 새싹을 틔운 것이다. 보도블록 사이로 빗물이 스며들어 씨가 발화한다. 조금이라도 더 해를 보기 위해 새싹이 자란다. 충분한 양의 햇빛을 머금은 새싹은 꽃을 피우거나 그렇지 못해 시들어 다시 흙이 되어간다. 인간의 관점에서만 그 꽃을 통해 생명의 강인함을 느낀다. 다른 동식물이 이 장면을 본다면 자연스럽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우리는 어떠한 현상을 바라볼 때, 자신의 입장에 대입해서 생각하기 쉽다. 이는 매우 자연스러운데, 이해의 매개체로써 자신을 이용한다. 보다 폭넓은 관점에서의 이해를 위해서는 이해의 매개체를 타자, 더 나아가 집단/사회/문화/국가/인류/생태계 등의 단위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처음에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일들도 상대방의 입장에서, 다른 문화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그들을 이해하고 공감하게 되면서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때가 있다.


수렵/채집 시대의 인간은 모든 분야의 전문가가 될 필요는 없었지만, 모든 분야에 대해 생존 가능한 정도의 기술과 지식은 가지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고도로 전문화된 사회인 현재는 자신이 잘하는 일 또는 할 수 있는 일 하나만을 잘하면 된다. 내가 모자란 나머지 부분은 다른 전문 기술과 지식을 가진 사람에게 맡겨야 한다. 수렵/채집 시대의 인간은 우리 가족 또는 집단 정도의 사람들과 잘 지내면 되었지만, 현재는 지역/문화/국가 단위의 사람들과도 잘 지내야만 한다. 더욱 긴밀한 협력이 필요한 시대다.


이해의 매개체로 타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은 협력의 기초가 될 수 있다. 타자의 입장에서 나를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온전히 타자의 입장에서만 문제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타자에게 예속되지 않도록 자신을 지켜나감과 동시에 타자의 입장을 이해한다. 다음은 나와 당신의 관계를 넘어 사회/문화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한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우리는 무인도에 사는 '나와 당신'이 아니다.


우리 삶은 매 순간이 선택이다. 아침에 정신이 들었을 때, 다시 잠을 청하는 것과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는 것. 점심 식사 시간에, 밥을 먹거나 모자란 잠을 보충하거나 해를 보며 산책하는 것. 일을 마치고, 침대에 누워 인스타그램을 하거나 글을 쓰는 것. 계속 반복되는 선택으로 우리는 경향성을 가지고, 그 경향성을 토대로 '나'라는 사람을 정의하고 탐구한다. '나'라는 사람을 매 순간 만들어 나간다.


기계는 경향성을 가지면, 이를 가속화한다. AI가 정보처리 속도가 빨라서 사람보다 많은 정보를 저장하고 처리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 첫 단추를 잘못 끼운다면 악화된 경향성을 가질 수 있다. 사람은 불규칙적이고 때로는 귀찮음과 같은 유혹에 넘어가기 쉽지만, 경향성을 뒤엎을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우리가 매 순간을 온전히 살아야 하는 이유다.


매 순간을 진실된 힘으로 살고, 그 진실됨 안에는 다른 존재를 수용하는 힘이 있다. 오늘 내가 마주한 보도블록 사이의 새싹은 특별하지 않다. 나는 새싹을 통해 때로는 생명의 강인함을 느끼고, 때로는 자연스러움을 느낀다. 새싹은 우리 사회에 큰 해를 가하지 않기에 그 자리에서 계속 살 수 있도록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나는 그렇게 순간을 온전히 살았다. 나와 너의 입장에서, 나아가서 우리 사회의 입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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