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반지를 잃어버려도, 오히려 좋아

by 김재용

나는 손가락이 짧은 데다가 굵기까지 해서 반지가 어울리지 않는다. 연애를 했을 때도 커플링을 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작고 예쁜 것에 대한 욕망은 항상 내 속에 있다. 꾸미기를 좋아하던 이십 대 때에는 귀걸이나 피어싱을 즐겼다. 남자가 장신구를 착용하는 것에 안 좋은 시선을 보내던, 성 역할 구분이 명확한 시기였음에도 장신구를 착용했다. 스카프를 하거나, 반다나를 머리에 두르거나, 팔찌나 발찌도 했다.


다만 반지만큼은 커플링이나 결혼반지 같은 것으로 인식이 나쁘지 않음에도 반지는 손가락이 굵은 내가 착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다가 반지를 한 손에만 세 개 혹은 네 개씩 끼는 지인을 알게 되었다. 그를 보면서 나도 반지를 샀다. 피부가 어두운 편이라서 검은색 반지를 샀다. 나의 손가락만큼이나 굵은 반지였다. 익숙하지 않음에 어색하고 불편했지만, 이내 적응되었고 다른 반지를 탐하게 되었다.


패션에 관심이 많은 편이라서 디자인 반지를 찾다가 '메종 마르지엘라'의 반지를 샀다. 첫 반지는 안 어울리면 지인에게 선물을 줄 요량으로 저렴한 것을 샀지만, 이번에는 오래 쓸 것이기에 나름 비싼 것으로 샀다. 새로 산 반지를 끼기만 해도 종일 벅찬 마음이었다. 간혹 안 좋은 일이 생겨 마음이 뒤숭숭해도, 손에 있는 반지만 보면 누그러졌다.


그 반지를 잃어버린 것은 페인팅 캠페인이 있던 날이다. 반지가 '페인트에 묻지는 않을까, 캠페인 도중에 땀으로 더러워질까' 염려되어 바지 주머니에 고이 넣어뒀다. 캠페인이 끝나고 손을 씻었다. 분명 바지 주머니에 반지가 두 개 있어야 했다. 하지만 두 개의 반지 중, '메종 마르지엘라' 반지는 주머니에 없었다. 가방이나 다른 주머니 등을 찾아 헤맸다. 당연히 다른 곳에는 반지가 없었고, 반지가 있어야 할 곳에 손을 넣어 다시 찾기 시작했다.


있어야 할 반지 대신에 작은 구멍이 있었다. 그 구멍에 나의 손가락 하나가 겨우 들어갔다. 주머니 구멍이 반지 역할을 대신했다. 그제야 찾는 것이 무의미함을 알았다. 야외 캠페인이기에 돌아다니며 찾는 것은 불가능했다. 비싼 반지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에 울화가 치밀었지만, 원인을 알고 나서는 오히려 후련했다. 아깝다 생각하고, 주머니에 넣지 말걸 후회하고,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스스로를 탓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좋아'라고 생각했다. 정신 승리라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통제할 수 없는 것에 집착하는 것은 미련하다. 새로운 디자인의 반지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라고 여겼다. 이번에는 반지 세트를 샀다. 한 개를 잃어버렸지만, 세 개를 얻었으니까 기분은 세 배로 좋았다. 나의 짧고 못 생긴 손가락도 세 배로 보기 좋았고, 반지를 낄 때의 충만함 역시 세 배가 됐다.


하지만 새로 산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아서 세 개 중에 하나를 잃어버렸다. 이번에도 역시 속상하지 않았다. 일단 세 개 중 하나를 잃어버려도, 두 개가 남았다. 하나도 없던 것보다 두 개라도 있는 것이 나았다. 심지어 사무실과 집 말고는 간 곳이 없어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설거지하다 고무장갑 뺄 때, 같이 빠졌으려나?' 출근하자마자 사무실 싱크대로 가서 고무장갑에 손을 넣었다.


그러나 반지는 그곳에 없었다. 나는 다시금 '오히려 좋아!'를 속으로 외쳤다. 이번에는 '각인할 수 있는 반지로 유일한 반지를 만들까?'라고 생각했다. 들뜬 마음으로 책상에 앉았다. 출근하면 사무실에 있는 슬리퍼로 갈아 신는다. 슬리퍼를 갈아 신으려고 바닥을 보는 데, 무언가 반짝거렸다. 냉큼 집었다. 포기한 상황에서 잃어버린 반지를 마주하자 '찾을 줄 알았다니까'하며 환희에 찼다.


스토아 철학에서는 통제할 수 있는 것과 통제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라고 말한다. 이 세상 대부분은 내가 통제할 수 없다. 따라서 모든 상황과 결정에 있어 힘쓰며 사는 것은 불행할 수밖에 없다. 행복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은 통제할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하여, 통제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나의 학생기록부에 자주 등장하는 말이 있다. "매사에 부정적이며..." 나는 통제할 수 없는 것을 언제나 통제하려 했다.


최근에는 부정적인 일이 생기면, '오히려 좋아'를 떠올리면서 통제 가능 여부를 구별하려 노력한다. 이 마법의 문장을 되뇌면 순간 침착해진다. 반지를 두 번이나 잃어버렸을 때처럼 말이다. 다만 모든 부정적인 일에 이것을 적용하기란 쉽지 않다. 이를 테면 트럼프가 대통령 재선에 성공한 것과 같은 상황에서는 한참을 풀 죽어지냈다. 트럼프가 당선되자 미국에 투자하고 있던 나로서는 자산이 늘었다. 그러나 전혀 기쁘지 않았다.

news-p.v1.20250531.2499c8757fff4b5baa157a6e13a4cd82_P1.jpg ⓒ 헤럴드경제. All right reserved.

비인권적인 트럼프 재선으로 가져올 부정적인 영향력이 눈앞에 뻔히 그려지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산이 줄어도 괜찮으니, 헤일리가 당선되길 바랐다. 미국 대선은 나의 통제 영역 밖의 일이다. 나는 미국 대선에 투표권조차 없으니 미미한 영향도 줄 수 없다. 이렇게나 명료한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고되다. 하지만 스토아 철학을 다시 적용해 보면, 통제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 출발이 필요하다. 나는 잃어버린 반지 찾기를 다시 시작해야 할 때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카카오 톡 생일 알림을 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