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선물을 주지도, 받지도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누군가에게는 차가워 보일 수 있겠다. 하지만 선물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소모적이라 느낀 적이 많았다. 카카오 톡에 생일 알림 기능이 생기고부터는 부쩍 심해졌다. 지인의 생일을 일일이 기억하지 않아도 됐다. 카카오 톡에서는 이를 알려주면서 선물까지도 쉽게 전할 수 있다. 선물하는 것이 편해졌지만, 나는 오히려 선물하는 것을 멈췄다.
선물에 진심을 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으레 주고받는 경우에는 다른 사람이 많이 주고받는 순위에서 골랐다. 카카오 톡은 연령대나 성별, 금액까지 세분화하여 추천했다. 감사함을 전할 때는 대부분 스타벅스 커피 쿠폰을 보냈다. 이것은 요식 행위에 가깝고, 받는 상대방의 입장에서도 그리 기쁜 일은 아닐 것이다. 내가 대체로 받은 선물을 그렇게 느꼈기 때문에 알 수 있다.
더군다나 형식적으로 주고받다 보면 놓치는 경우가 많다. 카카오 톡에서는 선물을 주고받은 기록이 남아 있어 상부상조하지 않음이 죄책감의 기록으로 남는다. 또한 상대의 선물과 나의 선물을 직접 비교할 수 있다. 이것은 나를 더욱 계산적으로 만들고, 최소한의 인사치레에 가깝게 만들고, 마음을 눌러 담기보다 마음을 배제하도록 만들었다. 이것이 반복되면서 소모적인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렇기에 카카오 톡에서 생일 알림 기능을 껐다.
반면에 얼마 전 사려 깊은 선물을 받았다. 함께 일하던 옆의 사무실 동료가 준 선물이었다. 내 사무실이 이사를 가면서 그는 제대로 인사조차 못했다며 수줍은 미소와 함께 선물을 내게 건넸다. "팀장님! 인센스 좋아하시죠? 사무실 곳곳에 인센스 있는 것 봤어요. 주말에 카페 갔다가 팀장님 생각나서 샀어요." 특별하게 포장을 한 것도 아니었고, 안에 들은 것은 인센스와 작은 간식 몇 개가 전부였다.
다만 나는 그의 마음이 예뻐서, 나의 취향이나 사소한 것까지 기억하는 세심함에 감동해서, 카카오톡으로 쉽게 전할 수 있음에도 직접 찾아와 건네준 행동에 마음이 벅차올랐다. 몸 둘 바를 몰랐다. 오히려 미안함을 느꼈다. 나는 그가 승진한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제대로 축하해주고 싶었지만, 카카오 톡 메시지와 알고리즘 추천으로 고민을 최소화하고 싶지는 않아서 미루기만 했던 내가 부끄러워졌다.
그는 나에게 선물의 본질을 일깨워 줬다. 이제껏 나는 선물을 주는 것보다 받는 것에 익숙했다. 손익을 따지기 때문은 아니다. 대체로 내가 상대방에게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관계에서 불균형은 항상 존재했고, 주도권은 언제나 내가 쥐고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온전히 내 착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주는 것에도 권력이 존재한다. 부담스럽지 않지만 그렇다고 상대에게 필요하거나 좋아할 만한 것을 선택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상대의 기쁨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오히려 내가 기쁨을 느끼고, 상대를 더욱 사랑하게 되고, 관계를 북돋울 수도 있다. 그저 선물 랭킹에서 고르는 것으로 형식적인 행위를 할지, 온 마음을 다해서 상대를 감동시킬지, 관계를 공고히 할지는 선물을 주는 사람의 선택에 달렸다.
나는 주는 사랑의 즐거움을 포기한 채 살았다. 그러다 보니 받는 사랑의 즐거움도 포기한 것이 되었다. 아무래도 내가 보답하지 않으면 받는 것도 줄어든다. 형식적이라며 관계를 버린 것은 나였다. 나는 단절했지만, 누군가는 다시 연결을 시도한다. 연결에 감응하는 내 모습을 보며 주도권은 주는 것에 있음을 알았다. 관계는 주는 마음이 닿을 때 비로소 살아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