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시간 동안이나 전화를 했다. 처음부터 오랫동안 전화할 생각은 없었다. 전화는 그 어느 공간에도 위치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몸이 위치한 공간에도, 상대와의 대화 공간에도 반쯤 걸쳐서 존재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전화는 그저 용건만 간단히 하는 것에 익숙하다. 만약 대화가 필요하면, 만나서 나누는 대화를 선호한다. 그와 오랜만에 만났지만 짧은 시간만 허락되었고, 우리는 일곱 시간 대화 이후에 다시 일곱 시간 전화를 했다.
열네 시간은 과거의 추억과 현재의 상황, 미래의 지향을 이야기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출근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일요일 저녁 열 시부터 월요일 새벽 다섯 시까지 통화했다. 사실 더 이야기할 수 있지만, 출근하기까지 두어 시간이라도 자는 것이 좋을듯하여 전화를 끊었다. 눈을 뜨니 수면 부족으로 위액이 분비되었다. 종일토록 속이 쓰리고, 하품을 연신 뱉어야만 할 만큼 고되고, 반쯤 눈을 감은채 몽롱한 종일을 보냈다. 다만 전화한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평소에는 강박적으로 매일 목표한 루틴이 깨졌다면 불안과 자책이 나를 지배했을 테다. 글도 쓰지 못했고, 책을 읽지도 못했고, 영어 공부도 못했다. 그럼에도 괜찮았다. 진정으로 연결된 느낌을 받는 것이 쉽지 않은 요즘이기 때문이다. 유사한 가정환경, 현재를 살아가는 방식과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것까지 대부분 맞추려 하지 않아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고작 하루정도지만, 그와 대화하는 열네 시간에서 외로움을 느낄 틈이 없었다. 그렇다고 우리의 대화에서 그는 내도록 나를 지지하거나, 나의 미래를 응원하기만 하거나, 나의 현재를 격려만 한 것이 아니다. 때로는 고집을 버리라며 다그치기도 했고, 이해할 수 없다며 의문을 드러낸다거나, 다른 삶의 방식을 조언해주기도 했다. 나는 부정당하면서 오히려 연결됨을 느꼈다.
같은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란 형제나 자매도 성향과 사고, 지향이 다르다. 하물며 다른 직업과 삶의 문화, 성장 경험 등 다른 것을 부정하며 서로를 깊이 알아간다. 우리는 상대가 상처받지 않도록 서로 간 예의를 지키며 무려 열네 시간을 통화했다. 서로 부정하기에 긍정할 수 있게 됐다. 애써 긍정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괜찮다. 우리는 획일화된 상대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 무한 긍정을 주고받는 대화였다면 깊은 연결을 느끼지 못했을 테다. 한병철 교수의 <투명사회>에 따르면, 계속되는 긍정은 빠르다. 빠름은 효율적이지만, 아무런 저항이 없다. 소통은 같은 것끼리 반응할 때 최고 속도가 된다. 즉 '나의 의지대로 되지 않는 것'으로서 주체인 타자를 긍정하며 내버려 둔다. 하지만 부정은 다르다. 나의 생각과 다르고, 내가 원하지 않는 행동을 하고, 나를 불편하게 하는 타자와 대화하며 조율하는 과정이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서로를 부정할 수 있으면서도 신뢰할 수 있는 타자와 관계 맺기를 하기란 쉽지가 않다. 인터넷 발달로 언제든 원하는 사람과 연결할 수 있다. 다만 연애를 할 때를 생각해 보면, 상대 마음을 얻었다고 생각되는 순간부터 소홀해지기 시작한다.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잃지 말자."라는 말을 사람들이 다짐하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 더 많은 사람과 연결될 수 있어서 연결하지 않는다.
이는 우연한 만남의 기회가 줄어드는 것과도 관계가 있다. 마치 나의 의지로 연결되고 싶은 사람을 선택하는 듯 하지만, 나의 취향을 파악한 알고리즘의 연결일 뿐이다. 긍정은 더 많은 긍정을 낳고, 부정이 사라진 자리에는 소통이 소멸된다. 나아가 나를 잘 이해하는 인터넷이 있으니, 안전하지 않은 현실에서 소통은 소거한다. 부정은 점차 긍정에게 자리를 내어준다.
나는 길을 걸어갈 때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고, 스마트 폰만 직시하며 걷는다. 외부의 소리는 음악에게, 집중은 스마트 폰에게 몽땅 내어준다. 원천적으로 타인과 접촉을 미연에 차단한 셈이다. 이는 내 속에 공고히 자리 잡은 긍정을 강화하며, 우연히 마주함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부정의 경험은 줄어들도록 한다. 따라서 그와 일곱 시간 동안의 전화는 내 삶의 지향과는 다를지언정 언제든 다시 전화기를 들게 만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