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테니스 클럽에서 만났다. 그의 첫인상은 가볍지 않았다. 큰 키에 다부져 보이는 몸, 묶어서 얼마나 긴지 가늠할 수 없는 머리 길이와 무심한 듯이 기른 수염, 야외 운동을 오랫동안 해서 그을린 것 같은 피부색 조합은 내가 쉬이 다가갈 수 있는 캐릭터가 아니었다. 적어도 나의 생활 반경에서는 그랬다. 그와 이야기를 나눠보지는 않았지만, 외적인 것에서 그가 살아내고자 하는 자유로운 삶의 지향을 추정할 수 있었다.
하루는 테니스 끝나고 회식을 했다. 그는 유쾌했고, 에너지 넘쳤고, 말과 행동에 자신감이 있었다. 사뭇 다르게 보이지만, 그와 나는 공통적인 부분이 많았다. 활동적인 운동을 좋아하는 것뿐 아니라,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고, 행복을 삶에 우선순위로 두는 것 등이 그렇다. 물론 각자가 추구하는 방식은 달랐다. 큰 차이는, 나는 현재보다 미래의 행복을, 그는 미래보다 현재의 행복을 원했다.
나도 한때는 계산적이지 않고, 하고 싶은 것이 생기면 무작정 도전부터 하는 사람이었다. 실패 따위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점차 나이가 들어가면서 도전보다는 실패를 두려워했고, 지킬 것이 생기며 미래를 계산적으로 계획하고, 미래의 행복함을 위해 현재의 자유를 포기하는 것이 편해졌다. 미래에 가질 행복을 상상하고, 미래로 행복을 유예하면서 자기 합리화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나보다 나이가 많음에도, 심지어 결혼을 앞두고 있어 지킬 것이 생겨도, 미래보다는 현재의 행복을 좇는 것에 두려움이 없다. 특히 놀라운 것은 그가 가진 관계에 대한 자신감이다. "재용아, 네가 오늘 얻은 것 중 가장 큰 게 뭔지 아나? 내를 얻은 거다.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내한테 연락해라." 나는 이토록 관계에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 기초가 궁금했다.
나는 그의 일상을 깊이 엿보기로 했다. 아침에 만나 테니스를 치고, 점심을 함께 먹고, 송정 해수욕장에서 바다 서핑 하기로 했다. 테니스 코트에 입장할 때부터 달랐다. 다른 클럽 사람이 연신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도홍아 왔나? 여기 구운 계란 있다. 하나씩 묵고 해라." 그도 역시 살갑게 인사 나누면서 구운 계란을 내 것까지 챙겼다. 한참 땡볕에서 테니스를 치고 있는데, 다시 그들이 와서 말했다. "와가지고 같이 수박 먹자."
송정에 서핑을 하러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안내에 따라 서핑 보드 대여 가게에 갔다. 가게에 들어갔을 때 사장님은 없었다. 그는 대뜸 카운터에 들어가더니 컵에 얼음을 퍼담기 시작했다. 이내 사장님이 돌아왔지만, 나를 제외한 누구도 상황을 이상해하지 않았다. 그는 사장님에게 함께 테니스 치는 동생이라며 나를 소개했고, 나는 사장님이 주시는 건강 음료를 마셨다. 사장님은 그에게 비싼 음료라며 한 박스를 슬며시 챙겨줬다.
그는 서핑을 하려면 만조, 즉 큰 파도가 오는 물때를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물에 들어가기까지 세 시간 정도를 기다려야 했다. 나는 읽을 책과 미리 다운로드한 넷플릭스 드라마, 글을 쓸 수 있는 키보드까지 준비해서 갔다. 나는 가만히 시간 보내는 것에 불안을 느끼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무책임하다 여기고, 어떠한 형태가 됐던 성과를 남기려 애쓴다. 평소에 나는 미래의 행복을 위해 잠깐의 시간조차 쪼개서 쓴다.
하지만 나는 미리 준비해 온 것은 가방에 그대로 두고, 그의 삶을 세밀하게 바라보기로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 둘 사람이 모이기 시작했다. 모여든 사람과 그는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 자리에 함께 있던 나도 이야기를 함께 나누며 웃고 떠들었다. 나는 모인 사람들의 이름도, 나이도, 직업도, 관계도, 모른 채 깔깔댔다. 나의 생활 방식에서는 상상조차 못 할 일이다.
이를 테면 같은 빌라에 거주하는 사람과 마주치기 싫어서 인기척이 사라지고 나면 문을 나서는 것이 일상이다. 또는 내가 안전한 사람임을 직업이나 나이 등으로 설명해야만 고작 몇 마디 나눌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의 삶은 그렇지 않았다. 내가 종일 옆에서 바라본 그는 온 마을과 함께 살아간다고 느꼈다. 그제야 그가 가진 관계의 자신감이 숱한 경험에서 근거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사실 그는 수학을 전공했다. 셈에 밝을 텐데 그는 전혀 계산적이지 않다. 오히려 계산적인 것은 나다. 우리 둘 다 좋아하는 파타고니아 옷을 사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나는 해외로 출국할 때나 인터넷에서 사는 것이 더 싸다며 그에게 나의 옷 구매 방법을 알려줬다. 하지만 그의 지인 중에 파타고니아 옷 가게를 운영하는 사장이 있다. 그는 옷을 돈 몇 푼 싸게 사는 것보다, 관계에 쓰는 것이 현명하다고 여긴다.
반면 나는 사회복지학을 공부했다. 주변 사람과의 관계를 돌보는 것은 나의 전문 영역이다. 직접 돌봄 서비스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돌봄에 대해 깊이 고민해서 많은 사람이 서로를 돌보고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내가 하는 일이다. 하지만 주변 사람을 잘 돌보는 것은 내가 아닌 그였다. 나는 현재의 자유를 포기하며, 성과에 집착하고, 주변인을 돌보는 것을 멈춘 지 오래다.
시간은 돈으로, 여유는 낭비로 치환되는 사회다. 극한의 성과를 추구하고, 현재의 행복을 미래로 유예하고, 짧은 시간조차 다른 사람과 대화 나누기보다 유튜브 쇼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우리 사회 대부분의 사람이 계산적이기만 하다면, 서로를 돌보지 않는 사람이 대부분이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는 나에게 자신의 하루를 살아보니 어떻냐고 물었다. 나는 계산적인 내가 부끄러워 "너무 좋은데요?"라는 말 이외에는 답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