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 중에서 선(善)과 악(惡)은 명확하다. 동물이라도 억압받아서는 안된다는 기본적인 권리, 거짓말로 상대방을 속여서는 안 된다는 사회적 합의, 외적인 요소가 사람의 존엄을 결정해서는 안 된다는 선언이 그렇다. 극 중에서 선은 엘파바, 악은 글린다로 대표된다. 선과 악의 대조를 통해 보는 이로 하여금 선을 추종하게 만든다. 따라서 이야기는 전형적인 영웅의 서사를 따른다.
영웅의 서사에서 선을 지키려 애쓰면 애쓸수록 역경에 처한다. 약간의 타협으로 쉽게 갈 수 있는 방법이 있지만, 주인공은 결코 타협해서는 안된다. 고난을 경험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주인공을 응원하고, 감정이입하고, 동일시하게 되기 때문이다. 엘파바에게도 마찬가지다. 죄 없는 동물을 위해 투쟁할 때도, 모두가 자신을 마녀라 흉볼 때도, 괴물 같은 자신의 외모에 비해 수려한 왕자 앞에서 비루하다고 느껴질 때도, 그는 옳다고 생각하는 행동을 한다. 이것을 외부에서 지켜보는 우리는 엘파바의 숭고함을 응원할 수밖에 없다.
반면 글린다는 고난의 상황에서 적당히 타협하고, 타자의 고통을 못 본척하고, 자신의 이익은 마다하지 않는다. 익살스럽게 묘사해 마냥 미워할 수 없지만 그는 전형적으로 악당의 서사를 따른다. 결과적으로 가장 소망했던 마법과 사랑을 얻는데 실패한다. 권성징악인 셈이다. 그러나 결말이자 도입부에서 알 수 있듯, 엘파바는 사악한 마녀로 글린다는 착한 마법사로 극 중의 사람들에게 기억된다.
극 중의 사람들에게 실제 선악과 다르게 기억되도록 하는 것은 선악의 경계를 흐리는 효과가 있는 듯하다. 실제 삶을 살아가다 보면 언제나 선을 고집한다는 것은 어렵다. 몇 번쯤 유혹에 빠져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있다. 다만 죄책감이 반복되다 보면 오히려 선을 적극적으로 회피하기 쉽다. 전체적인 이야기는 선과 악의 대조로 영웅과 악당의 서사로 끌고 가지만, 선악의 경계를 무너뜨리면서 공감하기 쉽게끔 한다.
나는 이러한 감정과 선택을 일하면서 자주 마주한다. 직장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나로서 산다기보다 외부의 기대에 순응하며 살아내는 것에 가깝다. 글린다의 삶처럼 말이다. 나는 시간과 노력을 대가로 회사로부터 돈을 받는다. 따라서 선한 것을 선택하기보다도 회사의 이익을 선택해야 할 때가 종종 있다. 때론 선보다 악에 가까운 행동마저도 서슴지 않고 행해야 한다.
이를테면 사회복지사로서 본질인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이나 시간 투여보다도 과도하게 요구받는 의전을 수행하거나, 필요하지 않음에도 예산 반납은 곧 삭감과 같으므로 예산을 억지로 쓰거나, 서비스를 받는 주민의 필요보다 제공하는 사회복지사의 편의에 따른 후원 물품 제공이 그렇다. 누군가 보기에는 악한 행동까지 아닐 수 있지만 사회복지사의 윤리 의식으로써는 선택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전문성이 실종된 것 같은 현장에서 이를 반복해서 보다 보면 엘파바가 글린다에게 "날 봐. 네 눈이 아닌 그들의 눈으로."라고 말한 것이 떠오른다. 이제는 관행처럼 굳어버려서 내가 문제 삼지 않으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 많다. 그들의 눈으로 본다면 이상할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옳지 않음에 순응하는 것이 쉽지 않다. 선을 고집하며 언제나 문제의 중심에 선다.
나는 영웅이 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또한 글린다가 온전히 악인이라는 것도 아니다. 글린다처럼 순응하며 사는 것이 지혜로울 수 있다. 단지 사람들의 기대에 맞추려 노력하기보다도 나 자신에게 떳떳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편하다고 느낄 뿐이다.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책임지려는 것뿐이다. 선과 악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싶지 않은 것뿐이다. 그 선택에 따라 착하지만 사악한 마녀가 될 수도 있고, 악하지만 착한 마법사가 될 수도 있다. 퇴사라는 결심은 그들의 눈에는 세상을 잘 모르는 미숙함이겠지만, 스스로를 곧게 바라보는 사회복지사로서 마음가짐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