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이 되지는 못하더라도 살인자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서고명은 테러범에게 하이재킹 당한 비행기의 모든 사람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내건다. 협상 결렬에 의한 인질 사망이나 폭탄 테러로 비행기 폭발, 심지어 자신을 살리려다가 칼에 찔린 테러범 리더의 죽음 중 하나의 사건만 일어나도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이 됐다. 그럼에도 고명은 타인을 살리려는 자신의 행동을 마땅히 해야만 하는 것으로 여긴다.
고명은 처음부터 책임감이 넘치는 인물은 아니었다. 자신이 속한 군대라는 조직과 초국가적으로 위험한 상황, 독재가 통용되는 시대적 배경을 명확히 이해하면서도, 권한 밖의 지시를 받자 못하겠다면서 덤벼드는 사람이 고명이다. 자신이 얻을 수 있는 이득과 확률보다 잃게 될 손실과 확률이 월등히 크기 때문이다. 지시를 따르기로 결심한 것은 절대적인 권력으로부터의 강압도 있었지만 훈장이라는 개인의 이익이 큰 역할을 한다.
나도 개인의 이익을 좇으며 사회복지사가 됐다. 사회복지를 전공했지만 적은 월급 받으며 일하는 사회복지사가 되지 않았으면 했다. 또한 사람들은 단지 헌신하는 직업으로 사회복지사를 여기지만, 사회복지사를 헌신짝처럼 갈아치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싫었다. 그래서 직접 현장에서의 실천보다는 현장의 사회복지사를 지원하는 사회복지사가 됐다.
하지만 현장을 지원하기 위해서는 현장마다 다르게 경험하는 어려움을 알아야 했다. 코로나19 감염 상황에서는 접촉이 금지되어 있지만 관계하는 주민이 안전하게 지내는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고민들, 경차에 후원 물품을 가득 싣느라 몸을 구겨 넣는 행동들, 지인에게 후원을 요청하거나 자신의 월급을 도로 기관에 기부하는 것들 등 진실된 어려움을 알게 되면 책임감을 느끼게 된다.
고명은 자신의 안위만을 걱정했다. 하지만 비행기 안에 있는 사람을 본 이후로 책임감을 느끼게 된다. "너에게 이들의 얼굴을 직접 보여주고 싶었다. 한 명 한 명의 얼굴을 잘 봐. 네 거짓말로 죽게 될 사람들의 얼굴을". 그는 훈장 같은 이익뿐 아니라 단 한 사람인 자신의 목숨보다 중요한 것이 있음을 행동한다. 알랑방구 뀌면서 훈장을 위해 비위를 맞추던 그는 온데간데없고, 상급자의 명령에 불복하면서까지 살인자가 되지 않으려 노력한다.
나는 책임지려고 모든 것을 내던질 수 있는 고명이 부러웠다. 내가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사회복지사는 영웅이 되지 못하더라도 책임질 수 있는 존재였으면 했다. 그러나 책임은 그것을 짊어질 수 있는 능력이 있을 때 비로소 행사할 수 있다. 현재의 나는 책임지는 것조차도 선택하지 못한다. 마음 같아서는 직을 걸고 사업 진행해서 사회 변화를 이끌고 싶다. 그 결과가 실패라면 깔끔히 물러날 각오도 되어 있다.
하지만 상대와 무너진 권력관계 아래서는 직을 거는 것조차 쉽지 않다. 현장을 지원하는 중간 조직 업무 특성상 구조적인 변화를 설득해야 함에도, 상대의 변하지 않으려는 관성과 문화를 꺽지 못한다. 추정하건대 오랜 시간 물이 스며들듯 서서히 설득하고, 설득이 통하지 않는 상대라면 설득이 통할만한 상대로 담당자가 바뀔 때까지 기다리고, 때로는 알랑방구 뀌면서 비위도 맞춰야 한다.
물론 당장 목숨이 달린 일은 아니기에 고명처럼 폭주하는 것도 방법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정당성이나 논리적 설득이 아닌, 관계 중심적으로 주고받기하는 것은 내가 잘하는 일이 아니다. 정치나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사회 변화를 협상하는 사람도 있다. 다만 내가 그런 방식으로 사회복지를 하는 사람은 아니다. 현재 내 직무는 협상을 능숙하게 하면서, 적당히 연륜도 있어서 둥글둥글하게 갈등하지 않는 능력이 필요하다.
누군가는 아직 내가 어려서 그렇다고 말한다. 마냥 부정할 수 없겠지만, 마땅히 해야 할 것을 못 본 체할 수 있는 성격은 되지 못한다. 영웅까지는 아니더라도, 온전히 내 실력으로 책임지는 사람이 됐으면 했다. 그러나 현재는 마땅히 해야 함을 알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을 느끼는 상황이 많다.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상황에서 퇴사라는 적극적 행동은 회피가 아닌 책임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