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에 제가 퇴사한다고 이제껏 쌓아온 관계가 전부 무너져 내린다면, 저는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내가 협력하며 일하는 사람들에게 종종 하는 말이다. 나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사회복지사와 조금 다른 역할을 맡았다. 일반적인 사회복지사가 주민들의 존엄한 삶을 위해 갖가지 실천적인 노력을 한다면, 나는 시스템을 바꾸거나 만들어서 환경적인 노력을 한다.
지자체에는 여러 유형의 사회복지시설이 많다. 사회복지시설은 대부분 비영리 단체다 보니까 경쟁 같은 것은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서비스를 하는 주민이나 지역이 겹치기도 하고, 비영리 단체에게는 숙명인 후원금 모집, 사회 문제 해결을 함께할 파트너 모색 등에서도 경쟁이 있을 수밖에 없다. 결국 실적으로 평가를 받고, 이로 인해 기관의 서비스를 확장하는 기회가 되기도 하기에 실제로 꽤나 경쟁적이다.
물론 일반적인 사기업들처럼 적대적이진 않지만 경쟁 관계에 놓인 이들을 협력의 파트너로 이끌어낸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나는 개별 기관에서 도전할 수 없는 사회문제를 함께 해결할 수 있다며 이상향을 보여주고, 이제껏 지역에서 활동하면서 쌓은 관계를 활용하여 설득하고, 때로는 소속된 기관의 지위를 이용하여 동참하길 요구한다. 그렇게 현장을 지원하는 조직으로서의 역할을 노력한다.
하지만 중간지원 조직이 가지는 뼈아픈 숙명이 있다. 대체로 중간 지원 조직의 사회복지사는 직원의 수가 많지 않은데, 관계성 기반으로 진행되는 업무가 많아 개인이 곧 조직이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러한 조직에서 직원의 퇴사는 조직이 수년간 쌓아온 노력을 순간 허공에 흩뿌리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내기도 한다. 서두에서 쓴 것처럼, 퇴사를 고민하며 우려했던 것은 오 년 간 쌓은 신뢰와 협력의 관성이 내 퇴사와 함께 사라지는 것이다.
"팀장님 퇴사하면, 위원 명단에서 앞으로 제 이름도 빼주세요." 개인적으로는 이 말보다 나의 일에 대한 거창한 칭찬이나 인정이 있을까 싶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암담한 말이기도 하다. 퇴사 에세이 연재를 보고서 협력하는 사회복지사가 내게 건넨 말이기 때문이다. 나는 다급하게 그를 다시 설득해야만 했다. 개인이 아닌 조직을 보고, 지역의 변화를 바라고, 함께 노력하는 동료들과의 경험을 상기시켜야만 했다.
인계서를 꼼꼼하게 써서 최대한 나의 공백이 없어야만, 치열하게 노력한 그동안의 시간이 헛되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인지 퇴사를 마음먹고 나서 업무 자동화에 혈안이다. 메일 회신이나 기관 홍보를 위해 썼던 콘텐츠 톤과 매너, 사업 계획서나 결과 보고서와 같은 행정 서류도 기관 아이디의 생성형 AI에 학습시키고 있다. 웃지 못할 사실은 퇴사를 위해 업무 자동화를 하며 일이 효율적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효율이라는 이름으로 담아서는 안 되는 것도 있다. 이곳의 로고부터 비전과 미션이라는 정체성을 만든 서사,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지향점 등이 그렇다. 사회 문제나 지역의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방식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고, 시대나 환경에 따라 바뀌어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효율적일지라도 다음 사람이 업무를 이어받았을 때 맥락을 이어갈 수 있도록 연결해 주는 과정도 필요하다.
퇴사를 하고 시간이 흐르면, 행정 서류뿐만 아니라 곳곳에서 나의 이름이 사라질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정의한 조직의 정체성과 맥락이 이어지는 것을 먼 미래에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나의 역량과 고민의 흔적이 조직의 역량이 되고 노력의 결과로 남은 증거가 될 테니 말이다. 따라서 퇴사를 준비하는 것은 나를 지우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나를 적극적으로 남기는 노력이기도 하다.